라이카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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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산 라이카, 백 몇십만원 준 것 같은데 얼마나 좋았으면 끌어안고 잤다. Leica M4-P]

‘가난과 결핍의 추억’

며칠 전 MP를 얻었습니다.

‘내가 이런거 쓸 자격이 있나? 그만큼 열심히 산거야?’

문득 든 생각입니다.

한 때 올림푸스 펜 시리즈가 품귀가 날 만큼 인기가 있었을 때, ‘가난과 결핍의 추억’ 때문일 거라고 멋대로 생각했습니다. 소풍날 아침, 엄마는 꼬불쳐 둔 비상금을 헐어서 주시곤 하셨습니다. 뛸 듯이 기뻐하며 그 돈을 받아들고 날 듯이 달려간 곳은 동네사진관이었어요. 사진관에서 가장 싼 값에 빌려주는 카메라가 올림푸스 펜이었습니다. 필름까지 끼워서 하루 종일 빌리는데 오천원쯤 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받아 든 카메라의 금속성 느낌과 무게감은 금방 부자가 된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잃어버릴까봐…어디 한군데 기스라도 낼까봐 애지중지 신주단지 모시듯 하느라 제대로 쓰지도 못했어요. 카메라를 돌려주러 가는 것이 무척 싫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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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째 라이카, 탁월한 카메라 수리공 김성민의 일갈에 M4-P를 팔고 M6을 샀다. 가장 많은 필름을 남겼다. Leica M6]

처음 산 카메라는 싸구려 자동카메라였습니다. 이 카메라로 연애도 하고 신혼여행도 다녀왔습니다. 내 돈으로 산 두 번째 카메라가 ‘로모’였어요. 바야흐로 ‘사진찍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네 삶이 우연의 연속이듯 로모를 알게 된 것도, 이 때 ‘사진을 찍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그랬습니다. 처음으로 뭔가를 열심히…몹시 열심히 했습니다. 삶을 2막으로 나눈다면 ‘사진찍기’ 이전과 이후로 나눌만큼 이 일은 중대하고 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어중이 떠중이 비리비리한, 하고 싶은 것도 잘 하는 것도 없는, 이력서 취미란에 ‘여행’ ‘독서’라고 영혼없는 빈칸을 채우던 아이가 비로소 그 빈칸을 단단하게 채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나 다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각성하는 것은 정말 끝내주는 경험이자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탐닉이며 절정입니다.’

일기를 뒤적거려보니 2003년이거나 2004년쯤인 것 같습니다. 보이그랜드(저희는 이렇게 읽었습니다.) R2를 샀습니다. 다른 모색을 하고 싶었을거에요. 한가방씩 들쳐업고 다니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작고 가볍고 속닥한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로소 내게 맞는 연필을 찾았습니다. 몇 개월 후 라이카를 만났습니다. 라이카를 처음 만나던 날을 잊을 수 없습니다. 늦은 밤까지 가지고 놀다 헤어지지 못하고 끝내는 끌어안고 잠들었습니다. 지금도 밤이 긴 날엔 라디오 켜 놓고 드러누워 천정으로 빈 카메라를 쏘면서 노는 버릇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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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 째 라이카, 벼락처럼 만났다. Leica MP]

카메라는 아니 라이카는 내게 도구 이상의 어떤 것입니다. 영감을 일으키고 욕망을 충동합니다. 사진을 찍게 하고 또 그렇게 매개합니다. 허세와 진지사이의 어디쯤에서 균형을 줍니다. 취미와 생활사이 어디쯤에서 조화롭게 합니다. 속도를 조율하고 방향을 상기하게 합니다. 비싸고 좋은 것 너머의 가치라는 현명한 자위입니다. 그리고 이런 변명은 돈이 가지는 적나라한 폭력성을 순치馴致합니다.

나는 늘 세상의 번거로움에서 떠나길 원했습니다. 임어당 선생은 차를 마시면서 이속離俗의 자유를 말합니다. 저는 사진을 찍으면서 이속의 자유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나를 만나는 과정은 탐닉이며 절정입니다.

이 사족은 카메라 하나를 앞에다 두고 늘어놓는 긴 변명입니다.

by PIU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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