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뤼식톤의 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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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같은 필름’

“엄마~~아빠 또 샀어~~이번엔 미국이야~~” 난 작은아이가 두렵다. 이놈은 내 일거수일투족을 1g도 빼놓지 않고 1호에게 일러바친다. 먼 길 찾아 온 택배박스를 낚아채더니 주방으로 내립다 달린다. 심장이 살짝 쫄깃해진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아주 잠깐 기백이 솟았지만 이내 조마조마해지고 만다. 전생에 난 새였음이 분명하다.

필름(양식이라고 읽는다.)재고가 간당간당하다. 통장잔고가 왜 항상 필름재고와 연동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렇다고 쓸쓸하다거나 울적한 기분에 사로잡히지는 않는다. 소시민적 좌절의 책임을 애꿎은 필름에게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참 난사질을 할 때는 100ft 롤필름이 일주일이면 거덜 났다. 처음엔 정품을 썼지만 촬영 량이 많아지면서 벌크필름을 쓸 수 밖에 없었다. 정품 한 롤이면 벌크필름 두 롤이다. 가난한 아빠사진가는 고민한번 해보지도 못하고 탄피 재활용법을 찾았다. 벌크필름을 파트로네에 감을 때는 제법 신경을 써야한다. 필름과 파트로네를 연결할 때 테이프의 끈끈이가 묻어나지 않도록 한다거나 스크래치가 나지 않도록 달래면서 롤러를 돌려야한다. 한 컷이라도 더 살리려면 버려지는 부분을 최소화해야한다. 이렇게 잘 감으면 벌크 한통에 스무 롤이 나온다.

지난 몇 년간 필름 값이 무척 올랐다. 대략 두세 배쯤 오른 듯하다. 게다가 주요필름들은 단종이거나 가격이 너무 올라서 샵에 가져다 놓을 수도 없는 지경인가보다. 마지막 물량이라는 문구도 뜨문뜨문 보이고 품절된 필름들도 제법 있다. Tri-X 한 롤에 만원. 국밥이 두 그릇이다. 차선책을 찾아볼 수 밖에 없겠다. 가성비가 좋은 필름을 수소문 해 보고 BnH도 뒤졌다. 선택장애가 있는 나는 한 가지가 선택되면 다른 것은 거들떠보지 않는다. 이런 성향은 지금처럼 변화의 기회가 왔을 때 다시 선택장애를 일으킨다. 안주형 인간의 말로는 늘 이 모양이다.

사진가에게 필름은 양식이다. 말해놓고 보니 나 같이 구식카메라를 쓰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다. 양식 걱정 없는 카메라를 쓰면 될 텐데 비싼 돈 들여가며 구시대 유물을 아직까지 붙들고 있다. 이유야 한두가지겠는가만은 뭉뚱그려보면 나는 아직 아날로그에 동기화 되어있다. 자동이나 디지털로는 내 몸에 내장된 구식 스위치를 켜지 못한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양식이 바닥을 보이면 불안하다. 저장의 욕구는 본능의 작용이다. 예전처럼 그렇게 식욕이 왕성한 것도 아니고 대식가도 아니지만 남은 양식으로는 초조해서 안 되겠다. 아직까지 국내보다 가격적인 매력이 있는 BnH에서 거래를 트는것으로 하자. 135판은 Kentmere 400으로 120은 선택의 여지없이 Tri-X다. 공감e현상소 추천으로 Acros도 추가했다. 한통 두통 담다보니 관세범위까지 꽉 채우게 된다. 몇 통을 더 넣었다 뺐다 심란하다. 더 담자니 세금도 걸리고 결재금액도 부담스럽다. 빼자니 부재의 불안과 허기가 엄습한다. 이러다가 좀 있으면 있는 카메라들 바람도 한번 못 쐬보고 필름 쫑나는 거 아닌가 싶다. 대안이 없으면 불안한 법이다. 먹어도 허기가 진다.

‘내 안의 에뤼식톤’

프리기아의 왕 미다스는 박쿠스 신에게 자신의 손에 닿는 모든 것을 황금이 되게 해 달라고 빌었다. 박쿠스 신은 ‘그 보다 나은 소원이 있을 텐데….’ 하면서도 그의 소원을 들어 준다. 이제 그의 손이 닿는 것은 모두 황금이 되었다. 급기야 자신이 먹으려는 빵과 고기와 물까지도 그의 몸에 닿는 순간 황금이 되어버리고 만다. 한 입의 빵도 한 모금의 물도 마실 수 없는 지경이 되고서야 비로소 자신의 탐욕이 부른 재앙을 후회하게 된다.

에뤼식톤은 신에게 까불다가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아구병에 걸렸다. 도시의 모든 음식을 먹어치워도 그의 허기는 채워지지 않았다.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채워지기는커녕 오히려 허기가 커져만 갔다. 이제 먹을 것도 먹을 것을 살 돈도 떨어져버렸다. 마침내 하나밖에 없는 딸까지 팔아 배를 채우던 에뤼식톤은 종국에 제 몸을 모두 뜯어 먹고서야 끝이 났다.

인간의 탐욕에 관한 이야기다. 결국 자신을 다 삼키고서야 끝장이 나고 마는 인간의 탐욕을 빗대어 에뤼식톤을 탄생시켰다. 에뤼식톤이 우습게 여긴 ‘신’은 우리 내면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니 결국 우리 자신이다. 후회하고 반성하여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미다스는 그나마 다행이다. 스스로를 다 먹어치우고서야 끝장이 난 에위식톤의 모습은 참담하다. 탐욕이 인간의 본성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절제되지 않는 탐욕은 재앙이다.

수북하게 쌓인 필름을 보면서도 이것 가지고는 택도 없겠다 싶다. 필름보관용 냉장고를 하나 사야겠다고 1호에게 말했다. 수두룩한 카메라와 렌즈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새로운 것이 없나 기웃댄다. ‘이 정도는 괜찮아! 고생했잖아 그동안…….’ 에뤼식톤이 속삭인다. 변하지 않은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필름을 감아써야하는 팔자라는 것.

by PIU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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