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율동 마애여래삼존입상


금요일 17시 칼퇴근을 감행했다.

아아, 얼마 만인가! 17시 칼퇴근이라니.

해가 아직 쨍쨍한데 이대로 곧장 집으로 가기는 아쉽지. 결국 차를 돌렸다. 15분 정도만 가면 마애불에게 갈 수 있으니 오랜만에 한번 들러야겠다. (회사가 촌에 있다보니 이런 짓도 가능하다. 남들은 공연보러 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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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공터에 차를 세워두고 마을 길을 따라 걸어가다 만난 집. 대문에 장미를 예쁘게 가꾸어 놓았다. 지나가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 이런 집들을 보면 주인의 성품도 넉넉하고 아름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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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길에 접어들자 간판이 서 있다. 오늘은 바로 여기를 온 것. 율동 마애여래삼존입상. 보물 122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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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5월이라 신록은 이미 지났지만 녹음이라고 부르긴 아직 옅은 여린 녹색의 싱그러움에 기분이 좋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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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초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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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하고 바로 왔으니 정장 바지에 구둣발이지만 뭐 어떠랴. 세속의 번뇌는 이미 주차장에 던져뒀다. 마음이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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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햇살은 소나무 그림자를 땅 위에 길게 누이고 가벼운 GR하나 손에 들고 톡톡 사진을 찍으며 산길을 걸으니 저절로 시상이 떠오른다. ㄷㄷ

호젓한 산길을 걸어 마애불을 보러 가노니
산새 소리 지저귀고 산들바람에 풀냄새 실려오다
세속의 번뇌는 주차장에 던져버리고
손에는 욕심버린 작은 카메라 하나 쥐었으니
아아, 라이카가 무슨 필요랴.

-GR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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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은 멀리 있지 않았다. 손에 든 GR만으로도 충분하니 굳이 라이카가 무슨 소용인가. 깨달음을 얻으며 한걸음 한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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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길지 않은 길을 계속해서 올라가면 새끼 오리 같은 국자들이 귀엽게 놓여진 약수터가 나온다. 오른쪽에 보이는 노란 국자 안에서 나비도 물을 마시며 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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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는 작은 산신각이 하나 있다. 불교와 토속신앙의 하이브리드를 보여주는 우리나라 사찰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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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겨운 작은 돌다리를 건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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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을 오르면 작은 요사채가 자리하고 있다. 이 곳의 마애불 만큼이나 내가 좋아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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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에 작은 동종도 하나 걸려있다. 여기에 걸터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상념(잡념)에 빠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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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보는 여러분의 것입니다.’ 누구든 언제나 조용히 찾아왔다 돌아가도 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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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집 살림치곤 아무렇게나 널려있던 수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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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으니 근심도 덜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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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도 없는 요사채 대문 콘크리트 기둥에 소박한 솜씨로 새겨진 연꽃 그림도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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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드디어 마주한 마애삼존불. 오랜만입니다 부처님. 10년만이네요. 여길 다시 온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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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한 규모의 이 곳의 마애불은 서산 마애삼존불을 떠올리게 한다. 전체적인 세련미와 조각 기법은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그 곳에 비할바는 아니나, 이 곳에서라면 괜히 마애불에 말도 걸어보고 자리에 앉아 먼 산을 바라보며 가져온 책을 편하게 읽어도 될 것 같다. 철저하게 계산된 완벽한 조형미에서 오는 경건함과 엄숙함에 압도되는 석굴암과 달리 소박하고 편안한 이런 석불들이 경주 곳곳에는 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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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대에는 삼존불 쪽에 그늘이 져서 사진 찍기엔 그리 좋지는 않다만 그게 뭐 중요한가. 난 깨달음을 얻었거늘.. (GR이면 되는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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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내가 좋아하는 요사채는 이 시간이 제일 빛이 좋다. 특히 저 전깃줄에 달려있는 백열전구가 참 마음에 든다. 10년전에 이 곳을 찾았을 때도 롤라이플렉스로 이런 구도로 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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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유자적한 시간을 꽤 즐겼다. 이제 내려가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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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싱그러움이 가득한 숲을 벗어나기가 무척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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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내려왔다.

길 끝에 속세가 보인다. 버려둔 줄 알았던 번뇌가 주차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2016.05.20. 경주 / Ricoh GR

카테고리:Drifting, Essay태그:, , ,

1개의 댓글

  1. 두대리…ㄷ
    GR찬가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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