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서재


남자의 계절, 가을

어느새 10월도 한 주 밖에 남지 않았다. 여름은 지나간 것 같은데 가을이 온 줄은 모르겠다. 올 가을은 비가 잦아 청명하고 높은 가을 하늘을 보기가 어렵다. 비가 오지 않는 날에도 대기가 흐려서 황사와 미세먼지에 만신창이가 되어버린지 오래된 봄날의 하늘 같다. 단풍 또한 이 곳 남쪽은 11월초나 되어야 절정에 이를테니 아침 저녁으로 제법 쌀쌀해진 것 말고는 가을의 정취를 느낄만한 것이 아직 없다. (아, 출근길 도로옆에 보이는 구절초와 야생 국화들이 잠깐의 눈요기가 되어주고는 있다.)

그래도 몸과 마음은 가을을 타는지 이유없이 축축 쳐지고 왠지 어딘가 좀 아픈것 같고 괜시리 옛 생각들이(옛 여자 생각) 들면서 센치해지기도 한다. 왜 가을이 남자의 계절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남자의 가을은 조금은 썰렁하고 외로워야할 것 같다. 어깨에 뽕도 제법 들어간 큼직한 카키색 트렌치 코트를 걸치고 주머니에 손을 깊게 찔러 넣고는 담배 한개비를 물고서.. 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아직 젊지 않은가. 구질구질한 잡념은 그만하기로 하자.

남자에겐 서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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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에겐 좋은 차와 넓은 집도 중요하지만 오로지 그만의 공간도 꼭 필요하다.

안방에선 와이프가 잠들고 나면 불을 켤 수도 없고 부시럭거리며 딴 짓을 할 수도 없다. 안방은 와이프의 것이다. 안방 다음으로 큰 방은 딸냄이 방이다. 아들이리라 확신하고 벽지를 하늘색으로 발랐다가 와이프에게 구박받았던 방이다. (분홍색으로 했었어야..) 그렇다면 거실은? 거실에도 당연히 이미 주인이 있다. 와이프와 딸냄은 나보다도 거실의 주인을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 가만 냅두면 거실 주인(TV님)은 아침부터 잠들기 전까지 눈을 시퍼렇게 뜨고 나를 거실에서 쫓아내려 들지도 모른다.

안방도 거실도 딸냄이 방도 모두 남자가 편히 쉴 곳은 아니다. 그래서 집에서 나만의 굴은 필요하다. 유치하게 와이프랑 한판 뜨고 분노한 척 문 쾅! 닫고 들어와놓곤 나가지도 못하고 눈치를 보며 숨어있을 대피소로서가 아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남자는 때론 굴에 들어가서 누구의 방해도 받기 싫기 마련이다. 특히 가을에는 더더욱.

가을에는 브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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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음악이나 좀 들어야겠다. 한 때 미친듯이 파고들었던 클래식도 요즘은 시들하다. 물론 출퇴근 길에 늘 KBS 클래식FM을 듣고 잠들기 전에 BOSE 블루투스 스피커로 듣는 음악도 모두 클래식이긴 하다. 하지만 정경화의 새 바흐 음반이 나왔는데도 장바구니에 넣었다 뺐다 하기만 하는 걸 보니 예전만큼 왕성하진 않은게 맞는 듯 싶다. 어쨌든 가을엔 브람스니까. 브람스를 들어야지. 브람스 교향곡 4번을 듣고 싶었는데 뒤적여 보니 없다. 칼뵘이 지휘한 빈필의 음반이 있는 줄 알았는데 음반이 아니라 고클래식에서 구입하여 iPod에 넣어둔 음원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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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향곡 4번 대신 에밀 길렐스가 연주한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선택했다. 70년대 녹음임에도 불구하고 좌우 스테이징이 아주 넓어서 눈을 감고 있으니 왼쪽에 바이올린, 오른쪽에 비올라, 첼로.. 그리고 그 뒷 줄에 앉은 목관, 금관 파트 들의 위치가 그려진다. 오디오에 전원을 넣은지도 얼마 만인지. 평소보다 볼륨을 더 올렸다.

독서의 계절

글 쓰면서 생각해보니 가을에는 참 많이들 별명을 붙혀둔 것 같다. ‘남자의 계절’이면서 ‘독서의 계절’이기도 하니 ‘남자의 공간’에서 가을의 브람스를 들으며 간만에 활자를 좀 읽어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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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칼 같이 분류해서 책을 꽂아두는 건 아니지만 이 쪽엔 음악 관련 서적들이 좀 많이 꽂혀 있다. 스코어를 읽으며 교향곡을 들어보겠다는 당찬 욕심으로 샀던 ‘음악기초이론의 이해’는 초등학교 음악 수업부터 다시 들어야할 내가 볼 책이 아니었다. ‘로스팅 교과서’는 이게 화학책인지 로스팅 가이드북인지 모를 정도로 너무 정교하고 과학적인 이론들을 펼쳐놓은 책이었다. 로스팅은 감이고 경험으로 하는거 아니었나요 ㄷㄷ  그나저나 피울님이 선물해주셨던 녹차를 우려마시던 깜찍한 1인용 다기가 저 높은 곳에 장식 마냥 올라가 있는 걸 보니 차를 마시지 않은지도 한참 됐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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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서 위주로 꽂힌 코너에도 아직 읽지 않은 책들 투성이다. 징비록 완역본은 국문 번역과 한문 원문이 양 페이지에 나란히 대조되어 있는 완벽한 역작이다. 징비록과 함께 세트로 읽어보려고 했던 난중일기도 펼쳐보지도 못했다. ‘심양장계’는 소현세자가 병자호란 후 청나라 심양에 끌려가 인질로 있으면서 조선에 보낸 장계들을 모아 엮은 가치가 높은 책이다. 이런 책은 나왔을 때 안사두면 인문학의 불모지 우리나라에서는 초판만 찍고 바로 절판되어 버릴지도 모른단 생각에 일단 사둔 것인데 과연 죽기전에 다 읽기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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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집들이 꽂혀 있는 쪽. 내 블로그의 제목이기도 한 Photo Nomad. 딱히 던컨의 사진을 좋아해서 정한 블로그 이름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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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놈으로 결정. ‘사진가의 우울한 전성시대’. 책의 제목이 무척  끌려서 샀던 책이다. 여러 챕터로 구성되어 있지만 책 제목이 된 세번째 챕터 ‘사진가의 우울한 전성시대’ 부분이 가장 좋았다. ‘작가를 꿈꾸는 사람들’, ‘아마추어 사진가의 미래’, ‘B급 작가에 대한 생각’, ‘타인의 고통과 사진 찍기의 괴로움’ 등의 글들이 막연하게 생각만 했던 사진에 대한 여러가지 고민과 의문점에 대해 어느정도 대답을 해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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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을 좀 축일까 하다가.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양주. 저 잭 다니엘은 언제 땄더라. 혼자서 몽골 보드카를 마실 수도 없고. 귀찮다. 참기로 한다. 지난번 지진에서도 용케 넘어지지 않은 술들인데 지진 후 모두 바닥에 안전하게 내려놨건만 깔끔쟁이 우리 와이프가 죄다 원위치 시켜 놨다. 지진이 다신 없길..

서재는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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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의자에 앉아 브람스와 차이코프스키와 쇼팽과 리스트를 들으며 책도 보고 지겨우면 눈을 감고 졸기도 하며 2~3시간을 보냈더니 복잡하고 지끈거리던 머릿 속이 좀 가벼워졌다. 이제는 뭔가 글을 좀 쓸 수 있겠다 싶어 PC를 켠다. 몸이 쉰다고 쉬어지는게 아니다. 남자에게는 밖에서 달고 온 밥벌이와 귀결되는 지긋지긋한 번뇌를 끊고 영혼을 리셋시켜줄 절대적 멍때림의 평화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야만 남자는 하루의 마무리라도 평온하게 맞이하고 내일 다시 이 악물고 전쟁터로 나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방해받지 않는 남자의 서재는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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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나의 서재. 이미 애기 장난감들이 하나둘 침투했다. 언제까지 내가 사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2016.10.22. 포항 / Ricoh GR

카테고리:Essay태그:, ,

1개의 댓글

  1. 저는 벌써 겨울을 그리나봅니다. 어제부터 Oleg Pogudin의 로망스를 듣기 시작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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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꼭 사수하기 바랍니다. 작업실로 진화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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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저도 분명 서재가 있었습니다. 꼭 지켜내시길 기원합니다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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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이게 유지가 되는군요. 전 제 방이 있긴한데 워낙 작고 구조상 찌그러져서 안방에서 쫒겨난 제가 잠만자는 방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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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부럽습니다. 그냥 저는 안방에 책상 하나에 컴하나, 스캐너 하나, 프린터 하나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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