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고독과의 대면


발왕산(1458mm, 강원도 평창) 추억입니다.

남쪽에선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눈이 내린다. 오랜만에 마시는 칼칼한 새벽공기에 설레임이 잔뜩 묻었다.

– 어데 멀리 가시능교?
– 예~~강원도 갑니다.
– 배낭 보이 산에서 잘라카는 갑네.
– ㅎㅎㅎ
– 부럽구마. 눈까지 이래 오는데 쥑이겠네~~~

기사아저씨의 살가운 인사가 칼칼함을 녹인다. 바람은 더 없이 좋구나.

– 잔돈은 됐구마!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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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틀버스를 기다리는 이십여분, 새벽 눈길을 달리는 사람들이 바람처럼 위태롭게 보인다.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몇 분이 함께 은행앞에서 동동거렸다. 나는 산으로 그 분들은 이제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간다.

다섯시간여 달려서 도착한 리조트 주차장 건너 한우집에서 아점을 먹었다. 국밥에서 라면스프맛이 난다. 이것도 진하다면 진한 국물 맛이다. 계산을 하면서 골드코스 입구를 물었다. 말투에는 사무적인 상냥함이 묻어있으나 내용엔 온기도 습기도 없다. 일부러 현찰을 준비했건만…몇 명의 리조트 직원들에게도 물어 보았지만 산행과 관련해서는 숙지하고 있는 정보가 없다. 안내판들도 불친절하긴 매 한가지. 갔던 길을 몇 번이나 뺑뺑돌다가 한쪽 구석에서 골드등산로 입구를 찾았다. 방향치, 길치임을 다시 한번 자각한다. 스낵바 뒤로 인적이 드뭄직한 곳에서 반가운 이정표를 찾았다. 발자국 하나 없다. 스낵바 직원으로 보이는 예쁜 여자가 구름과자를 아주 맛있게 먹고 있다. 눈과 여자와 담배가 섞인 풍경이 관능적이라고 생각했다.  아이젠이랑 스패츠를 착용하면서 서로 눈인사를 나눴다. 맑은 그 눈만큼이나 폐도 맑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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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흔적이 있다는 것은 뒷 사람에겐 축복같은 것이란 것을 알았다. 아직은 이렇게 희미하게나마 군데군데 흔적이 남았다. 이른 새벽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을 가야한다면 한발한발 온 정성을 다하라. 누군가 반드시 뒤를 따를 것이다.

나 보다 먼저 가신 이분은 결국 도중에 다른 길로 탈출하신 듯 하다. 가지런히 이어지던 흔적이 어느 순간 어지러워 지더니 끊어지고 없다. 덕분에 나도 알바를 심심치 않게 하였다. 출발한지 한시간여만에 골드등산로 약수터에 도착했다. 쉬며 놀며 흘얼거리며 왔다. 아직까지는 평안하고 평화롭다. 눈이 귀한 남쪽지방 사람에게 이렇듯 천지에 눈은 그것으로 이미 축제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밟히는 눈소리로 장단을 맞춘다. 아직 출발하지도 않은 지인에게 상황보고까지…’군데군데 길이 끊겨 있지만 걱정할만큼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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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등산로 약수터…소복한 눈이 많이 탐스럽다. 아직은 평온하고 평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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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숟가락 퍼 먹고 싶을만큼 소복하게 앉았다.

약수터를 지나면서부터 당황스런 상황이 이어진다. 이정표도 인적도 없다. 소복한 눈이 모두 삼켜버린 것이다. 눈이 깊은 곳은 스틱 두단이 빠질만큼 깊다. 돌아가야하나 고민을 했다. 짊어진 짐이 든든하니 여차하면 대충 아무곳이나 자리깔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드니 용기가 생긴다. 저녁에 만나야 할 사람들도 있으니 치고 올라가 보자. 방향만 잡아서 작은 흔적을 찾아 더듬더듬 길어 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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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수터 이후부터는 길의 흔적들이 대부분 지워졌다. 때때로 아득했으나 이미 돌아가기엔 너무 많이 와 버렸다. 멀리 몇 봉우리 넘어 드래곤 피크가 보인다. 그것을 이정표 삼아 가던 길을 재촉한다.

몇 번의 알바끝에 삼거리 쉼터에 닿았다. 레인보우 슬로프를 건너 길을 잡아보지만 한참만에 되돌아 오고 말았다. 더 이상 길을 찾을 수 없었다. 더구나 한길 이상의 눈이 길을 가로 막고 있다. 설피가 없는 상황에서 더 이상 진행은 무리다. 갔던 길을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은 황망하지만 도리 없다. 조금 전 지나온 슬로프를 떠올렸다. 슬로프를 따라 드래곤 피크까지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슬로프를 따라 오르는 것이 이렇게나 힘들지는 상상도 못했다. 허벅지가 터지는 줄 알았다. 관리요원과 스키어들에겐 재미난 구경거리가 생겼다. 모두들 한마디씩 하면서 쏜살같이 내려간다. 어떤 녀석은 머리위로 날아가면서 화이팅을 외친다. 슬로프 가장자리에 붙어서 그렇게 약 1키로미터를 치고 올랐다. 경사가 심한 곳은 기어오르듯 올라도 자꾸만 뒤로뒤로 미끄러진다. 아~~드디어 드래곤 피크가 보인다. 두시간 반이면 된다더니 다섯시간이나 걸렸다. 몇몇 스키어들이 고생했다면 하이파이브를 청해왔다.  ‘욕’이 기뻐도 나온다는 것을 이 때 알았다. 따뜻한 곤도라 대합실에서 한참을 놀았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늦은 오후, 이제 잠자리를 찾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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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금자리를 꾸미는데 칼바람의 진수를 보여준다. 일몰이 쏟아지는 광경이지만 흑백은 그저 담담하기만 하다. 착한 분에겐 찬란한 일몰이 보일거라 믿는다. 폐가 따끔거릴만큼 바람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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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먹지 못한 점심까지 먹어치우느라 저녁을 두번이나 먹었는데 아직 여덟시도 안되었다. 사실 산행을 할 때 끼니를 거르면 낭패를 볼 수도 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당황하게 되면 시야가 좁아져 정상적인 판단능력을 잃게 된다. 긴장은 놓지말되 여유도 잃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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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웠다가 앉았다가 … 뒤척이다 … 11시면 온다는 일행 마중이나 하자. 밖에서 놀다가 드래곤 피크까지 열 번도 넘게 왔다리 갔다리 했다. 12시가 넘어도 일행의 소식이 없다. 밧데리 때문에 꺼 놓았던 전화기를 켜 보니 11시경 산행을 시작했다는 문자가 와 있다.

새벽 세시반경에 일행이 무사히 도착했다. 그들도 나만큼이나 헤메고 고생을 한 모양이다. 가뭇 잠이 들었나 싶었는데 일단의 발자국 소리와 헤드랜턴 불빛들이 테트밖에서 춤을 춘다. 님이 오신 듯 반갑다.

겨울산에서 홀로 밤을 맞이하는 것은 절대고독과 직면하는 것이다. 두려움과 긴장과 설레임이 범벅된 양념하나 없는 날 것의 고독을 만나게 된다. 허파까지 따가운 찬바람을 한웅큼 마시면 뇌에서 가슴까지 막현던 통로가 재생되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온전히 홀로 던져진 나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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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아직 일행들은 꿀잠 중…삼피용과 설경이 물아일체를 이룬다. 아직 조망이 터지지 않은 아침 풍광은 몽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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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증명사진 찍으며 한참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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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먹고, 차 먹고, 커피 마시면서 환하게 터진 조망과 함께 늦은 아침의 여유로 호사를 누린다. 이 시간 이곳에 있다는 것이 무척이나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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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내려가야 할 시간이다. 내려서려는 걸음이 못내 아쉬운 이유가 드라마틱한 풍광 때문만은 아닐 것 이다. 자연도 함께한 그들도 모두 고마울 뿐이다.

2013. 12 / 강원도 평창 발왕산 / Ricoh GR

by PIUREE

카테고리:Drifting, Essay태그:,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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