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이 제 발 저리다.


 

와이프가 카메라를 정리해뒀단다.

퇴근하고 집에 오니 와이프가 나를 앉혀놓고 잔소리 겸 생색을 내기 시작했다.

“오빠 카메라 내가 정리해뒀어. 제발 카메라들 책상 위에 막 널부러 놓지마.”

“아 그냥 둬도 돼. 뭐하러 정리했어?” (내 서재는 건들지 말라!)

“그냥 두긴 뭘 그냥 둬! 쓰고 제 자리에 딱딱 두면 좋잖아. 그리고 무슨 카메라가 그렇게 많아? 하여튼 가서 봐. 내가 깔끔하게 해놨으니.”

“이따가”

“가서 보라니깐? 오빠가 얘기하던 제습함인지 뭔지 그런거랑 비슷하게 해뒀어. 습기 차지 마라고 바닥에 신문지도 여러겹 깔아놨고. 앞으로 거기서 꺼내 쓰고 찍고 나면 딱 넣어둬!”

내가 언젠가 얘기한 적이 있는 제습함이란 걸 기억하고 있다가 본적도 없을텐데 비슷하게 만들어 두고자 한 와이프가 기특하고 고맙긴 했다. 어떻게 해뒀는지 사실 궁금하긴 했지만 냉큼 일어나 가보기는 왠지 지는 기분이다. 그래서 잔소리 겸 자랑을 하고 싶은 듯해 보이는 와이프의 말을 그냥 넘기고 다른 얘기로 화제를 돌리려고 했다.

그러나…

도둑이 제 발 저리다.

“근데 라이카는 웬거야?”

“응? 무슨 라이카? 은색?” (내게 라이카가 하나밖에 더 있었나..)

“응. 그거 뭐여? 언제 샀어?”

“뭔 소리야? 그거 산지가 언제인데?”

“언제 샀는데? 난 못 봤어.”

“작년에 내가 그거 산다고 니콘 렌즈 몇개 팔고 막 그랬잖아. 그리고 그거 가지고 사진 찍어주고 들고 다니고 할 때는 아무 말도 안해놓고 이제 와서 웬 라이카라니?”

“그런가? 난 못봤는데.”

“못보긴 뭘 못봐?”

“렌즈 판다고만 했지 샀다고는 안했잖아?”

졌다. -_-

그냥 카메라 정리해둔거 보라고 할 때 얼른 서재로 갈 걸 그랬다. 요새 와이프의 카메라 보는 눈썰미가 날로 예민해지는 것 같다. 문제는 오늘처럼 갖고 있던 카메라도 처음 봤다며 눈을 흘기는 경우가 잦아지고 있다는 건데, 그럴 때 마다 떳떳하게 사놓고도 왜 와이프의 맹공에 버벅이며 대답하게 되는지 모르겠다. 평소에 지은 죄들이 있다보니 이럴 때일수록 진짜 몰래 뭔가를 저질렀을 때 보다 더 당황하는 것일지도.. (아무래도 와이프 몰래 M3와 비슷하게 생긴 M2나 M4 따위를 들이는 일은 불가능할 듯 싶다. 바르낙 IId 따위는 더더욱..)

평소에 지은 죄

평소에 지은 죄라고 하니 몇주전 일이 생각난다. Contax T3를 팔아먹고 난 후 결국 똑딱이가 아쉬워 GR1s를 들였다. 늘 가지고 다니는 디지털 GR과 ‘거의’ 똑같이 생겼으니 이건 걸릴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이건 죄가 아니다. T3 판 돈으로 산 건데..) 하지만 딸냄을 데리고 동물원에 가면서 아무 생각없이 GR과 GR1s를 같이 들고 가는 실수를 저질렀다. GR로만 찍고 있을 때는 아무 탈이 없었다. 그러다 필름으로 좀 찍어야겠다며 GR1s를 꺼내서 몇 컷을 눌렀는데.

“그거 필름이었어?”

“응?”

“디카 아니었어? 디카도 있지? 그건 뭐야? 언제 샀어?”

“이거 있던건데…”

별 일은 없었다. 착한 우리 와이프님께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주신 것이리라 생각하며 요즘은 납작 엎드려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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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우리 와이프가 정리해준 카메라들. 물론 저게 다는 아니다.

2016.10.12. 포항 / Ricoh GR

카테고리:Essay태그:,

1개의 댓글

  1. 아직 연장다운 연장은 안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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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저도 비슷비슷하게 카메라 추가해 왔습니다. 아내는 잘 모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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