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따는 날


첫 서리가 내렸다.

 

 

내 처가는 경북 청송이다. 이상하게도 청송하면 ‘청송교도소’를 가장 먼저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청송에는 주왕산 국립공원도 있고 사진 하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은 가보았을 ‘주산지’도 있다. 그리고 청송의 고추와 사과는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품질을 자랑한다.

올해 첫 서리가 내렸으니 이제 그 유명한 청송 사과를 딸 때가 되었다. 처가의 농사일을 그리 자주 도와드리지는 못하지만 고추와 사과 따는 날은 되도록 빠지지 않으려 한다. 물론 말이 ‘사과를 따는’ 날이지 건장한(?) 청년들의 임무는 힘 안들고 재미있어 보이는 ‘사과 따기’가 아니라 사과 박스 나르기다. 하루종일 사과를 나르다보면 정말 허리가 펴지지가 않을 정도인데다 그 여파가 며칠은 이어지는지라 서리가 내리고 나면 솔직히 두려움이 밀려온다. 올해도 시즌이 시작되었다.

.

.

.

r0023206

가득가득 실려 나오는 사과들. 작년보다 알도 굵고 수확량이 확실히 많아보였다.

.

.

.

r0023181

철저히 임무는 나뉘어져있다. 사과를 따는 파트, 리어카로 사과를 나르는 파트, 그렇게 온 사과들의 꼭지를 자르는 파트까지. 주로 연세가 드신 동네 할머니들이 꼭지를 자르신다. 사과 꼭지를 잘라야 상자에 넣었을 때 꼭지에 긁혀서 사과에 상처가 생기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

.

.

r0023207

꼭지를 따면서 크기가 작거나 색이 덜 났거나 상처가 있거나 한 사과들은 빼야한다. 그렇게 걸러진 사과들만 해도 수북히 쌓인다. 물론 먹기에 전혀 지장이 없는 사과들이지만 우리나라에서 과일은 예쁘지 않으면 상품성이 확 떨어지기에 어쩔 수 없다. 3일에 걸쳐 따낸 사과를 사가기로 한 도매업자는 사과를 살펴보며 크기 작은 것을 자꾸 집어 넣는다고 잔소리를 하며 돌아다닌다.

“사과 좀 잘 보고 넣어주소! 이마이(이만큼) 작은 걸 다 넣어놓으면 안되는데.”

“아이고 사장님요. 뭐 입이라도 안심심하게 눈깔사탕이라도 한봉지씩 사주고 뭐라하소.”

“눈깔사탕 사줄라캤는데 눈깔사탕만한 사과를 다 넣고 있으니 못사주겠심다.”

“예예~ 잘 보고 넣고 있습니다. 일 하다 보니 몇 개 그런게 들어간게 있을수도 있지예..”

“몇개만 들어간게 아니니 내가 뭐라 카는거 아인교?”

그렇게 실랑이 아닌 실랑이를 벌여도 양쪽다 기분이 나빠보이진 않는다. 사가는 상인은 사과가 마음에 들어도 사과가 좋다는 말은 절대 하지 않는다. 올해 시세가 떨어졌더라느니 색깔이 작년보다 못하다느니 그런 얘기만 자꾸 할 뿐이다. 할머니들도 이미 선수들이다. 사장이 자리를 뜨고 나면 궁시렁 거리며 좀 작다 싶은 사과도 다시 넣기 시작한다.

“앞에서는 예~ 예~ 하고 그냥 넣음 되니라. 지 말대로 하면 사과 농사 짓는 집은 다 망하라고.”

.

.

.

r0023188

꼭지 따는 할머니들은 아침부터 종일 쉴새없이 수다를 떨며 일을 하신다. 공주에서 시집을 와 ‘공주댁’이라고 불리는 할머니와 다른 할머니의 대화가 특히 재미있어 안듣는 척 하면서 귀를 기울이며 박스를 날라댔다.

“사과 접 붙일 때가 엊그제 같은데 시간 참 빠르데이~.”

“그러게유. 시간도 빠르고 세월도 빠르고. 이러다가 늙고 죽겄지유.”

“죽긴 와 죽어. 난 안죽을기라.”

“안죽고 어찌 사나유. 늙으면 죽는게 순린디..”

“조선 사람 다 죽어도 내는 안죽을 참이라. 이 좋은 세상 놔두고 우예 가노. 내는 절대 안죽을 참이라.”

.

.

.

r0023192

크기와 색깔을 분류하고 꼭지를 자른 사과들이 20kg 짜리 박스에 채워지면 저울로 가져가 무게를 달아야한다. 20kg보다 600~700g 정도는 더 나가도록 사과를 넣고 빼며 무게를 맞춘다. 괜히 아까운 마음에 20kg에서 더 주지 않으려고 요리조리 사과를 빼곤 했는데 내가 그렇게 해둔 박스에 장인어른께서 다시 사과를 두세개씩 더 넣으시는 걸 보곤 그냥 나도 넉넉히 넣기로 했다.

.

.

.

r0023196

무게를 달아둔 박스들을 다시 경운기에 옮겨 싣는다. 경운기에 싣고 가서 도매업자의 트럭이 들어오는 자리에 가서 다시 내려놓아야한다. 저울에 잰다고 들고 옮기고, 경운기에 올렸다가 100미터도 안가서 다시 내리고.. 정말 밭 전체에 컨베어 벨트라도 깔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래도 우리 처남은 착하다. 회사일을 비우고 3일 동안 일을 거들었다.

.

.

.

r0023210

우리 장인어른. 땅 한 평도 없이 청송에 들어와 지금은 그래도 마을에서 꽤 성공하신 축에 들어가신다. 작은 체구로 그 많은 일들을 하시는 걸 보면 정말 대단하시다는 생각만..  오후가 되니 나는 점점 더 허리가 구부정해지고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이 집 사우는 아침에는 번쩍 번쩍 들더니 오후되니 힘이 다됐나보네?”

어느 할머니가 뱉은 소리에 아니라는 듯이 또 박스를 들어 옮긴다.

.

.

.

r0023211

요즘은 시골에도 일손이 달리니 외국인들을 많이 쓰고 있다. 작년에도 왔던 베트남 사람들이 예닐곱 들어왔다. ‘신짜오~ (안녕하세요?)’ 하면서 말 걸고 고향이 하노이냐 호치민이냐? 나도 베트남에 대학교 때 가봤다. 쌀국수랑 반미는 진짜 맛있었고 다랏이랑 판티엣 정말 멋있더라. 어쩌고 저쩌고 하고 싶었지만 일단 체력이 고갈되니 입이 안떨어진다. 무슨 놈의 사과가 끝도 없이 나오냔 생각만 들었다.

.

.

.

r0023236

해가 짧으니 5시만 넘어가도 제법 어둑해진다. 이제 작업이 막바지로 향하고 있다.

.

.

.

r0023241

탐스러운 사과들. 올 가을엔 햇빛이 많이 나지 않아 걱정을 했었는데 그래도 생각보다 색이 잘 나왔다. 사실 색이 잘 나기 위해서 들어가는 수고도 만만치 않다. 나무 밑에 은박 반사 비닐을 까는 건 기본이고 사과 주변의 잎들을 하나 하나 잘라 햇빛을 가리지 않도록 하는 잎 소지 작업도 해줘야 한다.

.

.

.

r0023234

“이제 시마이합시다! 그만하고 나오소!”
작업 끝. 사과 따던 아주머니들이 나오고 있다. 사실 무거운 박스를 들고 나르는 것보다 쉽고 재미있어 보이기만 하던데 사다리에 올라가 불안정한 자세로 사과를 하루종일 따고 나면 허리 어깨 등 곳곳이 다 아프다고 한다. 꼭지 따는게 결국 제일 좋아보인다.

.

.

.

r0023229

해가 곧 지기 때문에 얘네들은 야적해두었다가 내일 다시 꼭지를 따야한다. 새벽에 서리가 내릴 것이므로 거적으로 덮어둬야 한다.

.

.

.

r0023222

그리고 오늘 하루 작업한 사과들. 오전에 작업한 것 중 100상자 정도를 도매업자가 싣고 갔고 해지기 전까지 730상자가 더 나왔다. 올해는 이렇게 3일을 땄다.

.

.

.

장가가고 얼마 안되었을 때였다. 어딘가 몸이 좀 안좋아 손이 좀 부었던 적이 있는데 얼마나 부었나 보자며 장모님께서 내 손을 잡은 적이 있었다. 그 때 내게는 별 말씀없으셨는데 나중에 와이프랑 통화하시면서 이렇게 얘기하셨다고 한다.

“우서방은 진짜 일도 안해봤겠더라. 손이 하얗고 보들보들한게 애기 손이더라 아주. 일도 못시키겠다.”

뭐 그렇다고 해서 진짜 일은 안시키신 건 아니지만 항상 맘이 쓰여하시는 게 느껴진다. 하기 좋은 말로 ‘안되면 나중에 시골에 가서 농사나 지어야지!’ 라고 얘기하기도 하지만 두 분이 하시는 일을 옆에서 지켜만 봐도 나는 정말이지 ‘농사나’ 지을 자신은 없다. 그럼에도 이렇게 하루라도 반짝 일을 거들어 드리고 나면 때론 조금 부러워지기도 한다. 하늘과 땅의 순리에 따르면서 내 정성이 들어간 만큼 되돌려주는 가을의 풍요를 느끼며 사는 이런 삶.

이 얼마나 건강하고 정직한가 말이다.

2016.11.01. 청송 / Ricoh GR

카테고리:Essay태그:, ,

1개의 댓글

  1. “하늘과 땅의 순리에 따르면서 내 정성이 들어간 만큼 되돌려주는”
    이게 참 중요한 데 말이죠.

    Liked by 1명

  2. 청송사과를 처음 맛보았던 것은 사진 선생님을 따라서 주산지를 방문했던 2003년의 가을이었습니다.
    주산지도 절경이었지만, 그때 베어물었던 청송사과의 맛은 아직까지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로 그 이후로 제게 대한민국 최고의 과일은 청송 부사입니다.
    왕부럽네요 ㅎㅎ
    몇해전까지는 청송에 가서 직접 먹어보고 사과를 사오기도 했어요…
    청송에서 공보의하던 후배한테 방문하기도 하고 말이죠.
    올해는 저도 무척 기대가 됩니다^^
    좋은 글과 사진 감사합니다~!

    Liked by 1명

    • 으흐, 사과는 조만간 배송될거에요. 그 때 맛이 나야 할텐데 걱정입니다. 나중에 시간되시면 청송 출사해도 재미나겠어요. 감사합니다 🙂

      좋아하기

  3. 장가 잘 갔네요. ㅎㅎㅎ

    좋아하기

  4. 사과 진짜 많네요.
    맛난 사과는 걱정없이 드시겠네요. 역시 남자는 장가를 잘 가야합니다. ㅎㅎ
    보는 내내 흐뭇해지는 글과 사진 잘 봤습니다.

    좋아하기

  5. 하늘과 땅의 순리에 따르면서 내 정성이 들어간 만큼 되돌려주는 가을의 풍요를 느끼며 사는 이런 삶.

    이 얼마나 건강하고 정직한가 말이다.

    —> 정말 그렇습니다. 정말로 ……………… (반성하게 됩니다;;;)

    좋아하기

  6. 좋은 사진과 정성스러운 글 잘 봤습니다.

    좋아하기

  7. 피요님은 여러모로 행복한 남자이십니다.
    사진의 사과색감만 봐도 탐스럽네요.

    좋아하기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

%d 블로거가 이것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