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7


14280-0

어떤 것의 부재는 어떤 것의 존재를 더욱 강하게 나타낸다.
무엇인가 머물렀다 떠난 자리는 그 무엇이 그 곳에 있을 때보다 더욱 깊어진다.
시간은 그곳에 무게를 더하여 존재했던 어떤 것을 단단하고 완고하게 만들지만,
우리는 기묘하게도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으로부터 미세한 불안의 요소들을 느끼게 된다.
나는 오래 전에 그 정원에 서 있었고 또 아주 먼 미래에 그 곳에 서 있을 어떤 사람을,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서 만난다.
그가 묻는다. 너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느냐고,
나는 이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다. 그저 그 곳에 고여 있는 시간들을 보고 있다고.
그보다 더한 슬픔이 이 세상에 있을까.

-황경신, 괜찮아, 그 곳에선 시간도 길을 잃어 中

 

카메라를 잡은지 3년 쯤 되었을 때일겁니다.
큰 카메라와 무거운 렌즈 – 소위 장비질에 물릴 때 쯤, 리코(Ricoh)의 R10이라는 똑딱이를 들였습니다. 별명이 라이카(Leica) R10이었는데, 무시무시한 흑백 결과물을 보여줬습니다. 전형적인 자동카메라 – 켤 때마다 플래시를 수동으로 꺼줘야 하는 똑딱이의 결과물이라고는 믿기 어려웠습니다. 한동안 R10과 필름 몇 롤만 주머니에 넣고 다녔습니다.

그해 겨울 이 장면을 만났습니다. 이촌동의 좁은 골목길 안, 진눈깨비가 흩날리던 날이었습니다. 홀리듯 담고나서, 오랫동안 벽의 풍경을 찾아 헤매고 다녔습니다. 한참 후에야 앗제(Eugene Atzet)를 알게 되고, 푼크툼(Punctum)이니 스투디움(Studium)이니 하는 용어도 배웠습니다. 이런 장면을 부재의 풍경이라 부른다는 것도 알게 되었구요.

B급 사진의 모토는 황경신씨의 글을 조금 변형한 것입니다.
나의 과거 혹은 나의 미래일 수 있는 존재의 부재를 마주치는 것, 그저 눈물을 흘리며 고여 있는 시간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어쩌면 사진의 본연이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필연적인 슬픔을 아는 사진가들과 B급 사진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카테고리:Essay태그:, , , , , , , , , ,

1개의 댓글

  1. 시간이 가는 것인지 오는 것인지에 대해서 무척 오랫동안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다. 네~~여전히 제가 맛이 간 상태이긴 하지만 비슷한 분들을 만난 것 같아 좋습니다.^^ 삐끕에서도 고여있는 의미있는 시간을 많이 만들 수 있길 …우리가요.

    Liked by 2 people

  2. 오늘 좋은 글들을 너무 많이 접하는군요.

    Liked by 1명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

%d 블로거가 이것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