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철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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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2 / KTX / Leica M6 + Summicron 35mm 5th + 400TX]

 

철커덩 쿵덕 철커덩 쿵덕 어려서부터 나는 기차를 좋아했다. 소리도 냄새도 느낌도 좋았다. 맨 앞 칸에서 뒤 칸까지 왔다 갔다 하다가 차장아저씨에게 쿠사리를 먹곤 했지만 외갓집 가는 덜커덩 비둘기 열차는 함께 가는 외삼촌만큼이나 멋지고 듬직했다. 시내버스 한정거장 가기가 힘들만큼 멀리를 심하게 하던 내게 기차는 다른 세상을 열어주는 은하철도 999! 기차를 타는 것은 신나는 일이었고 항상 좋은 일이 생겼다.

어른이 되어서도 기차는 기대와 설렘이었다. 아카시아 향기와 함께 실려 온 그녀가 내게 옆자리를 물어봐 준다거나, 창백한 그녀가 물끄러미 바라보는 창밖으로 눈물 같은 비나 눈이 쏟아진다거나 하면 나는 어쩔 줄 몰라 하겠지. 그래도 그러면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상상은 기대와 설렘이 되지만 그토록 긴 세월 옆자리 인연은 참으로 박복하였네라. 복도 복도 이런 가재 복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여전히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다. 수백 번 배신당하고도 아직 정신을 못차린거다. 예약하면서 오늘은 선약이 있는 옆자리를 선택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융 할아버지가 말한 ‘무의식’의 시킴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2015. 1. 27. 9:18 서울행 KTX 8호차 10C 좌석으로 발권했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으로 넘쳐나는 플랫폼에서 콧김을 구경하는 사이 기차가 도착했다. 저기 앞 빈자리에서 빛이 난다. 긴 머리에 눈같이 뽀얀 그녀가 옆자리에 앉아 있다. 안경에 낀 서리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0.025초 동안에 스캔을 마치고 태연한 척 옆에 앉았다. “실례합니다.”

스마트 폰을 만지작거리는 손가락이 옥비녀 같다. 굵직한 컬이 능선같이 펼쳐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길 때는 아카시아 향기가 펄럭인다. 책을 읽으려고 꺼냈다가 덮었다. 노트를 꺼냈다가 몇 줄 끄적이다 말았다. 등을 붙이고 눈을 감았지만 꼼지락 숨소리까지 또각또각 들린다. ‘너 내가 이러는거 아니!’

그녀는 대전에서 내렸다. 내리는 뒷 모습을 한참동안 보았고, 인파속을 걸어가는 동안 아주 잠깐 옆모습도 보았다. 말이라도 걸어볼 껄 그랬다. 도라지 위스키가 땡기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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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의 댓글

  1. 뭇사내의 마음을 흔들리게 만드는 아가씨~ 항상 인생은 그런거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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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운이 좋으시네요. 저는 여지없이 할머니 할아버지, 덩치 큰 아저씨입니다. 기대도 없어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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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저는 어느 여인네가 앉아서 꾸벅꾸벅 졸면서 머리가 막 제 어깨로 넘어오고 막..그랬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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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ㅋㅋㅋ 그래도 운이 좋으십니다. 전 한덩치랑 같이 앉은적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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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캬~~~ 역시.. 술 맛나는 글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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