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만큼 울고 싶은 날에 격포에 가자.


6:00 알람이 운다. 20년 동안 무싯날이면 들어왔지만 아직도 낮설다. 건조하게 우는 알람을 퉁명스럽게 끄고 다시 몸을 접었다. 용도 폐기된 알람을 지우지 못하는 것은 아침형 인간으로 생산적 하루를 시작해 보겠다는 명시적 의지의 표현이라지만 매번 이 모양이다. 어제는 종일 비가 내리더니 새벽부터 삼킬 듯 바람이 일었다. 격포에 온지 삼일째, 아직 마실을 나가보지 못했다. 늦은 아침을 먹고 떠날 것이니 그 전에 둘러봐야 한다. 사자 같은 용기로 아랫목에서 몸을 뺐다.

꽁꽁 싸매고 나섰지만 콘도 현관을 열자 바람이 들이쳤다. 파카 모자를 움켜쥐고 몸을 숙여야할 지경이다. 잠시 망설였으나 나선 걸음이 아까워 언 땅으로 걸었다. 스산한 여명이 휘감고 지나간다. 유니폼을 입은 쪽머리의 젊은 여자 두 명이 바람사이를 위태하게 걸어왔다. 콘도로 출근하는 그녀들은 포구사람일까 대처사람일까. 변방에 쌩뚱 맞게 들어앉은 거대한 자본덩어리가 포구사람 가운데 몇 명쯤에겐 대처식 밥을 벌게 했을 테지만 그 덕이 동네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리를 차고앉을 명분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불야성 건너 마을은 꽁꽁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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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자본 아래 마을은 왜소하고 위태로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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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에 내려섰다. 바람이 맵다. 해를 등지고 아침바다를 마주하는 것이 동쪽에서 온 나그네에겐 생경한 그림이다. 낮고 편안한 바다를 기대했지만 오늘처럼 슬픈 바다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여명과 버무려진 바다와 구름이 만나는 끝에 섬들이 꿈처럼 누웠다. 곱게 다져진 모래위로 조금씩 해가 부서진다. 해변을 가로질러 걸었다. 주태백이 놀다 죽은 채석강을 옮겨놓은 곳이라 이름도 그대로 가져왔다는데 어울리는 이름 같지는 않다. 운이 좋았다. 물이 밀려가고 난 다음이라 돌길이 열려 있다. 켜켜이 쌓였다. 돌로 새긴 시간이 인고의 유구함을 증거한다. 땅의 역사를 드러내 보이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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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구름과 맞닿은 수평선 끝으로 섬이 꿈처럼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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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광을 받으려는 고운 모래가 생경하다. 낮은 바다는 서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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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태백이 놀았을 것 같지 않다. 채석강이란 이름이 생뚱맞다고 생각했다. 나이테를 드러내 보이는 땅의 저의를 알리 없지만 이것은 장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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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실 나왔으니 마실로 가자. 겨울 격포 아침은 볼거리가 없다. 지난여름 뜨거웠을 식당과 크고 작은 숙박업소들이 맥락없이 엉켜있다. 텅빈 골목으로 황량한 바람이 지나고 나는 혼자 그곳으로 걸었다. 어제 내린 비가 깨진 보도블록 사이에서 얼다 만 채로 질퍽인다. 조악한 간판이 점령한 거리에 염분 먹은 수조가 벌겋게 뒹구는 포구의 겨울 풍경은 삭막하다. 화장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골목풍경이 시리다. 분식된 삶에 지쳐 내가 그립거든 겨울 포구에 가자. 무대 뒤 헝클어진 삶을 날 것으로 보고 싶거든 겨울 포구에 가자. 이 곳에 낭만 따위는 없다. 그래서 나는 겨울 포구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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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해변가는 맨살이고 속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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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찬 항구 역시 적막하다. 때가 아닌 모든 것은 윤기가 없다. 남은 것은 기다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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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동 해물을 하선하고 있다. 이 아침 항구에 살아있는 것은 저 크레인이 유일해 보인다. 크레인 옆에는 사내가 타고온 듯한 BMW 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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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하는 크레인 옆으로  BMW가 늘어섰다. 서정적인 것은 구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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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개장한 듯한 수산시장 옆 너른 공터엔 쓰다 버린 어구들이 널부러져 있다. 살림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다. 먹다남은 음식, 하다만 설거지, 널부러진 빨래 따위가 삶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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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쪽 마을은 제법 온기가 있다. 간혹 불이 들어온 식당 연통에서 김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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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해가 부드럽다. 양장입은 여자가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바람만 잦아들면 좋겠는데…눈물 콧물 범벅에 손이 곱아서 사타구니 사이에 넣고 한참 비볐다. 목에 건 라이카는 한 컷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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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놈아! 밤새 안녕했구나. 눈섭 문신은 누가 해 주더냐. 아무나 좋아하면 안된다. 꼬리로 땅을 쓸어본들 네게 줄것이 없단 말이다. 사람이 좋으면 사람에게서 죽는다. 아무나 좋아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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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 앞 노점상. 나중의 것이 먼저 있던 것을 밀어내는 것이 인지상정이라지만 아직은 버텨내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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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가에 가려면 옹천에 들러 택시를 타고 가야했다. 그때 그 곳이 꼭 이랬다. 겨울 포구에 낭만이 없다는 말은 여기서 취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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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전에 마을에서 만난 여자를 여기서 다시 만났다. 대처로 출근하는 모양이다. 하늘 보다 바랜 간판이 정겹다. 발이 시릴때까지 이곳에서 어슬렁 거렸다. 마트가 열면 오뎅이라도 먹을 수 있을까 해서다. 격포터미널 앞은 겨울 격포의 백미다. 격포 일경이 채석강이라고 하지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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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꽁 언 몸으로 숙소에 돌아왔다. 파자마, 반팔 티셔츠, 슬리퍼 차림의 사람들이 로비를 가로질러 다닌다. 높은 천정에 거대한 샹드리에가 있고 대리석 바닥엔 먼지 한 톨 없다. 로비 가운데 진짜 나무보다 키가 큰 크리스마스 트리가 놓여있고 반라의 사람들이 엄동설한에 수영을 하고 있는 이곳은 천국인가!

2016. 12. 27 / 격포 / GR

카테고리:Drifting, Essay태그:, , , , , ,

1개의 댓글

  1. 글을 읽고 있으니 정말 그곳에 있는듯한 착각이 드네요!!
    멋진 글과 사진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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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저도 피울님 만큼 글을 잘쓰고 싶다는~ 아니 의미있는 글을 쓰도록 노력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은 글과 사진 감사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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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좋은글과 사진 감사합니다.
    역시나 멋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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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사진에서 겨울의 싸늘한 칼바람을 느끼게해 주는군요.
    글에서는 겨울 포구의 무거움과 쓸쓸함이 사진과 잘 어우러지며 묻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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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겨울 포구의 매력이라고 생각하는데 … 날씨까지. ㅎㅎㅎ
      사진은 그나마 바람이 없네요^^
      형님들 모시고 백합죽 먹으러 가도 좋겠다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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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옆에서 콧물 훔치며 같이 돌아다니다 온 것 같습니다.
    사진도 잘 찍어 글도 잘 적어 역시 본사는 뭐가 달라도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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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막상 겨울바다를 보라가면 추워서 얼마 있지도 못하지만, 그래도 겨울이 되면 시원한 바다를 보고 싶어집니다. 이런저런 핑계로 겨울바다를 못본지 꽤 된갓 같은데 새해를 핑계삼아 훌쩍 떠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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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바다만큼 울고 싶은 날에는 격포로…
    바람 부는 날에는 압구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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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제목에 걸맞게 쓸쓸함이 묻어나는 사진들을 보며 갑자기 겨울바다로 떠나고 싶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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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동행하듯 스크롤하는 이 느낌 …. 피울님 글의 매력입니다.
    GR 컬러색감을 못찾는 저로서는 읽는 내내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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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늘 좋게 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GR은 아쉽게도 칼라로 찍기 시작하자마자 사망의 길로 들어선 듯 합니다.^^
      장기이식이 필요한 듯 하나 고이 장사치는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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