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다, 눈을 크게 뜨고


러시아는 어쩌면 숙제와도 같았습니다.
가보고 싶은 곳이 아닌, 가봐야 할 곳에 가까웠습니다.

지금껏 가지 못한 건 철의 장막이라는 이미지, 체첸과 그루지아로 상징되는 폭력성, 독재자와 비밀경찰, 만연한 관료주의와 세계 최악이라는 항공 서비스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은 상트 페테르부르크라는 도시를 알게 되면서 바뀌었습니다.

제정 러시아의 오랜 수도, 북부의 베니스라는 별명, 차이코프스키와 쇼스타코비치를 배출한 곳, 키로프발레단의 고향, 도스토예프스키와 푸시킨의 원고를 볼 수 있는 곳, 세계 3대 미술관 에르미타주, … 결국 가보자는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러시아로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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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길은 제법 다이내믹했습니다.
예약한 항공편을 항공사가 임의로 바꾸면서 항공사와 모스크바 – 상트 페테르부르크 연결편 협상을 해야 했고, 정작 비행기에 오르고 보니 프로세스를 정확히 알고 있는 승무원이 없었습니다. 짐을 찾고, 입국 신고를 하고 연결편을 발권받고, 다시 탑승 수속을 끝내고 국내선으로 갈아타야 하는데, 그 시간이 고작 1시간 20분이었거든요. 행운을 빈다는 투의 승무원의 얘기에 차라리 웃음이 나왔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 공항의 셔틀은 비오는 활주로를 느긋하게 가로지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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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상트 페테르부르크 풀코보공항을 빠져나와 넵스키대로에 도착했을때는 이미 밤 12시 무렵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이 초저녁 분위기였습니다. 백야는 6월부터 7월까지지만 8월에도 늦게까지 해가 떠있다고 하더군요.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걸 보며, 비로소 여행을 왔구나. 생각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넵스키대로를 걸어 아니치코프다리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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넵스키대로는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북서-동남으로 가로지르는 8차선 도로입니다. 백화점, 대형서점, 식당과 펍, 여행사와 티켓부스 등이 위치한 이곳에서 여행자들은 하루를 시작합니다.

넵스키대로를 걸어가다 처음 마주한 아니치코프다리입니다. 유명한 말조련사의 동상이 네 귀퉁이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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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만으로 이어지는 위대한 네바강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백 여 개의 운하와 지류로 닿아있고 운하와 지류에는 8백 여 개의 다리가 놓여있습니다. 폰타나운하와 아니치코프다리는 대부분의 여행객이 처음 마주하는 곳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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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건너 러시아박물관의 입구에서 푸시킨을 만났습니다. 뭐랄까, 그림처럼 새들이 앉아있었습니다. 지나간 것은 그리움이 될 것이다. 그의 시 한구절을 떠올리며 박물관으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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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오픈한 러시아박물관은 미하일로프스키 궁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전체 박물관은 마블 궁전, 미하일로프스키 성, 스트로가노프 궁전으로 나뉘어있습니다.) 11세기의 이콘화를 시작으로, 40만 점에 달하는 – 전 시대의 러시아 예술품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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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나절 정도 걸려 미하일로프스키 궁전을 훑어볼 수 있었습니다. 클 것이라 생각은 했지만, 정말 크더군요. 이럴 줄 알았으면 시간을 더 할애하는건데, 후회했습니다. (이런 후회는 러시아에 머무는 내내 온갖 장소에서 계속 반복됐습니다. 대부분 상상보다 훨씬 크더군요.)

이콘화 엽서 몇 장을 사고 피흘린 구세주 교회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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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흘린 구세주 교회는 모스크바의 성 바실 성당을 축소해놓은 듯한 이미지인데, 1883년부터 1907년 사이에 건립되었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그리도에도프 운하 옆으로 거대한 쿠폴(양파모양의 지붕)들과 화려한 프레스코화가 파란 하늘과 잘 어울리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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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내부는 특유의 푸른색과 금색이 어우러진 프레스코화로 가득차있었습니다. 벽으로부터 천장, 심지어 쿠폴 안쪽까지 성화가 그려져 있고, 가장 큰 쿠폴 안쪽에는 예수그리스도가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교회 밖으로 나와, 운하를 따라 카잔 성당으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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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1년 건립된 카잔성당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두 번째로 큰 성당입니다. 바티칸의 베드로 열주 회랑을 모방한 반원형 회랑은 무시무시하게 크지만, 성당 내외부의 장식이 소박하고, 무엇보다 경건한 분위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게다가, 다른 주요 성당들과 달리 현재도 예배당으로 쓰이고 있었습니다.

성당 안은 꽃과 초를 든 사람들로 가득차있었습니다. 수많은 러시아인들이 꽃을 바치면서 성상이나 이콘화에 입맞추는 – 정교회 방식의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셔터를 누르는 건 옳지 않을 것 같아, 그저 초를 켜고 잠시 머물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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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지 아쉬운 마음에 성당 앞을 서성이다 마린스키극장으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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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토큰입니다. 개찰구에 넣으면 그걸로 끝. 내릴 때는 체크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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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린스키극장은 1860년에 설립된 러시아 최고의 발레 극장입니다. 많은 분들이 모스크바의 볼쇼이극장을 최고로 치지만, 적지 않은 분들이 마린스키극장을 더 위대한 곳이라고 합니다. 2차대전 당시 독일의 러시아 침공 때 (당시 레닌그라드) 시민들이 발레를 보며 독일의 봉쇄에 맞섰다는 그 극장입니다. 마린스키극장은 처음 건립된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있고, 그 당시의 시스템 그대로 발레를 볼 수 있습니다. (흔한 마이크나 음향시설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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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색과 백은색으로 장식된 극장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호화롭지만, 가장 호화로운 건 2백 년 넘게 극장의 주인공으로 남아있는 키로프 발레단일 것입니다. 여름 시즌이 끝난 후라, 백조의 호수나 호두까기 인형과 같은 메인 레퍼토리는 없었지만, 흥미진진하다는 바흐치사라이의 샘을 볼 수 있었습니다.

공연은, 문외한인 제가 봐도, 아, 이건 진짜다. 싶었습니다. 발레라는 걸 처음 보는 듯한 기분으로 한없이 빠져들었던 것 같습니다. 흔한 마이크 하나 없이 홀을 가득 채우던 오케스트라의 연주도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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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번의 커튼콜을 끝으로 공연은 막을 내렸지만, 떠나기 아쉬운 마음에 한참을 서성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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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로 돌아오는 길에는, 아쉬운 마음만큼 짙은 어스름이 깔려 있었습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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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의 댓글

  1. 아. 러시아! 개인적으로도 꼭 가보고 싶은 나랍니다.
    사진 하나 하나가 그곳에 가보고 싶게 만드네요.
    잘 읽었습니다.

    Liked by 1명

    • 우리에게 알려진 것과는 참 많이 다른 곳이었어요.
      문화수준이 굉장히 높구요. 사람들이 꽤나 친절하고 정이 많아보였어요. (참견 좋아하는건 한국사람과 비슷하구요.) 물가 저렴한 편이고, 관광객이 많아서인지 영어도 제법 통하구요. 한번 가보시길 권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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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로망의 땅. ^^
    출사지로 고고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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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도대체 안 가보신 곳이 있으신지…
    사진과 글이 정말 가보고 싶게 만드는군요!! 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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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왜 제목을 캐나다, 눈을 크게 뜨고 라고 읽었을까요. 아름답습니다. 러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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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아…
    이게 투 비 컨티뉴라니.
    대체 이 뽐뿌를 견딜 수 있을까요?

    귀한 사진과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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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다른 러시아의 도시들과 다른 어떤 문화적 진수를 맛 볼수 있는 곳으로 보고 접근을 해야 할까 봅니다.
    암쪼록 덕분에 다시 여행적 머리속을 정리해 보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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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오늘도 앉아서 떠나는 영바트래블의 세계여행.. 붸리 붸리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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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러시아…너무 추워서 집에만 있어야 하니까 특별히 다른 재미난게 없으니까 그렇게 글이 좋은 걸꺼야라고 하기엔
    전체적인 풍경과 도시의 모습이 참 아름답네요.
    하여간 여긴 정말 다방변 총제적인 뽐뿌매거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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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러시아라곤 이르쿠츠크밖에 못가봤지만 넓은 땅덩어리만큼 가볼 곳이 정말 많은 것 같습니다. 저는 캄챠카 반도랑 야말 반도 가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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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이번 여행기의 컬러색감은 아주 굿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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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상트가 그렇게 운하가 많은 곳인지 처음 알았네요. 저는 언젠가 꼭 시베리아 황단 열차를 타 보고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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