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막연한 기대감


 

여행에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은 출발 전에 이미 반 이상 채워진다. 무언가를 꼭 봐야 한다거나, 미지의 인물과 만나고 싶다거나, 꿈같은 숙소에서 잠들고 싶다거나… 막연한 기대감이 그 즐거움이다.

그 중에서도 날씨는 사람이 결정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여행에 있어서 더욱 더 큰 염원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대부분  ‘날씨가 좋으면(?) 좋겠다(??)’ 정도의 애매모호한 바람만 가질 뿐, 자신에게  <좋은 날씨>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미처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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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연히 서울보다 파란 하늘과 바다를 기대했던 나는, 고속도로에서부터 내리기 시작하는 비 때문에 마음이 내내 무거웠다. 그런데, 통영항을 따라 천천히 속도를 늦추면서 달라졌다.

차의 속도에 맞춰 한결 느린 속도로 찻창에 미끄러져 내리는 빗물과 함께  내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던 <좋은 날씨>에 대한 애매모호한 바람도 빗물이 미끄러져 내리듯 자연스럽게 내 밖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이 시간과, 이 속도, 이 느낌을 기억하게 하는 이 비야 말로 이 순간 통영과 너무나 대책없이 잘 어울리지 않는가?

주차를 하자마자 밖으로 나서려는 일행들을 잠시 붙잡았다.

“시동 끄고, 10분만 더 있다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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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이지만 해저터널 안은 노란색 등 외에는 다른 빛을 허락하지 않았다. 동양 최초의 해저터널이란 이름을 달고 일제 강점기인 80여년 전에 만들어졌을 당시에는 어떤 느낌이었을지 궁금하다.

육지와 미륵도를 잇는 구름다리가 있었지만 임진왜란 당시에 죽은 자기네 조상들의 수몰 현장 위로 조선인들이 지나다니는 것이 못마땅해서 그 아래로 해저터널을 만들었다는 사연이, 습하고 침침한 터널의 길이만큼 눅눅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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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안에는 개통당시 사람들이 우마차와 함께 지나다니던 모습의 사진과 함께, 이곳 출신의 예술가들의 사진도 함께 볼 수 있게 해놨다. 좋은 취지에서 만들어 놓았겠지만, 한때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부유했던 중소도시에서 가끔씩 이런 장면들을 볼때마다 떠오르는 것이 있다.  바로, 고속도로 휴게소 변기 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문호들의 글에서 발췌한 한 줄 메모들이다. 인생의 통찰은 온데간데 없고 그 허무함의 껍데기만 가득 쌓아놓은 느낌이랄까?

하지만, 이런 껍데기 까모으는 걸 좋아하는 나로서는 산양면을 가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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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평동 전혁림 미술관.

작가가 30여 년 동안 생활하던 집을 미술관으로 바꾼 이 공간이 좋아서 통영을 갈 때마다 들르곤 한다. 한적한 길 주위로 은행잎이 나부낄 때면 이곳에 눌러 앉고 싶은 마음마저 든다.

작가는 정식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색채의 마술사라는 찬사를 받을 만큼 독특한 색감과 작품세계를 구축해서 한국 추상화를 개척했다고 한다.

예술은 선생이 필요없다. 자기 혼자 배우는 것이다…라는 작가의 말에 깊은 공감을 느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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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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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은 다도해 부근에 있는 조촐한 어항이다.

부산과 여수 사이를 내왕하는 항로의 중간 지점으로서

그 고장의 젊은이들은 ‘조선의 나폴리’라 한다.

그러니 만큼 바다 빛은 맑고 푸르다.

박경리, <김약국의 딸들> 중에서

통영 사람들이 그 이전부터 스스로 조선의 나폴리라고 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공식적으로 작품을 통해서 그렇게 표기한 사람은 아마도 박경리가 처음이 아닐까 싶다.

그 당시 나폴리를 가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마도 외국 것이라면 다 좋아보이던 시절이니 또 이해가 간다. 조그마한 항구에 그만한 찬사가 또 있었을까? 아, 조선의 나폴리.

김약국의 딸들을 읽어본 것도 아주 오래전이라 가물가물하지만, 올해는 토지에 도전해보고 싶다…고 껍데기를 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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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통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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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김약국의 딸들 이야기 때문에 살아서 통영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박경리,

이념문제에서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는 윤이상,

그외 친일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한 예술인들…

어쩌면 통영은 근대 우리 역사의 증거를 아프게 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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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양면 해안도로를 달리다보면 왜 조선의 나폴리와 같은 수식어를 붙였는지 알만하다. 굽이굽이 아름답고, 가끔씩 만나는 포구는 고즈넉하며, 그곳에서 지는 해를 보고 있자면 온갖 생명의 기운이 잠들 듯 평온한 마음을 얻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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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와 미륵도를 잇는 충무교 아래이자, 해저터널 위 등대.

다시 뭍으로 돌아와서…통영에 가게 된다면? 이란 마음으로 통영에서 마주치길 기대하는 것들을 다시 기억해보자.

1. 바다

2. 산양면

3. 역사적 배경들

4. 다찌집

5. 다찌집

6. 다찌집

7. 다찌집

8. 다찌집

그래 다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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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가려고 했던 다찌집에 예약을 하지 않고 갔더니 초저녁에 벌써 재료가 다 떨어져서 장사를 마친다고 했다. 매번 올 수 있는 통영이 아니어서 아쉬움이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온통 머리속은 다찌집인데 애매한 횟집을 갈 수도 없어서 근처에 있는 만포진 다찌집을 찾았다. 우리를 반기는 젋은 사장님의 외모를 보고는 그 음식 내공이 조금은 의심이 들었지만, 안방 구석에 자리를 내주는 마음씨를 보고 불안감은 운에 맡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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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들은 당연히 회가 좋지만, 이렇게 여러가지 해산물로 한 상을 차리는 집들도 유명하다.

군산은 실비집이라고 하고, 마산은 통술집, 그리고 통영은 다찌집이라고 한다.

잡어회, 전복, 멍게, 굴 등등 날것에서부터 찐 게, 아구수육, 찜같은 요리, 그리고 볼락구이까지…

회를 좋아해서 돌돔, 감성어 같이 고급 회로만 배를 채우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맞지 않는 곳이지만, 이것저것 제철 해산물을 맛보면서 한 잔 나누기에는 다찌만 한 곳이 없다.

군산의 실비집은 가격대비 좋지만 이처럼 화려하지 않고, 마산의 통술집은 날것보다는 익힌 것들 위주라, 진정 해산물을 좋아하는 식도락가들에게는 통영 다찌집은 가히 지상낙원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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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게, 지상낙원에 갈 때 무얼 가지고 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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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만포진 다찌집은 두고두고 좋은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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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포진에 만족했다고 처음의 목표가 꺾인 것은 아니다. 그 다음에 통영을 찾았을 때에는 이른 시간에 예약을 하고 물보라다찌로 갔다. 몇몇 통영 출신 후배들에게 수소문한 결과, 자기 가족은 다들 여길 간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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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보라다찌에 오려고 서울에서 친구들을 몰고 왔다며, 익히 몸에 베여있는 경상도 사투리로 너스레를 떨고… (20년 전 수법이라 이제는 통하지 않는 개그같은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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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이리도 많이 나오나 싶지만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다.

돌돔, 감성돔, 농어 따위가 없을 뿐이지 제철 잡어회도 훌륭하다.

원래 볼락은 고급 어종이 아니었는데, 이제는 이렇게 구워먹을 수 있는 것도 호사로운 느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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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가 무르익을 즈음에 물보라다찌 주인장인 백여사님이 자리에 앉았다.

“총각들은 서울에서 뭐한다꼬 여까지 왔노?”

“어무이, 내가 통영 구경도 못해본 서울 촌놈들 델꼬 왔다아입니꺼 “

음식이 한참 더 나올텐데 이렇게 못먹으면 어쩌냐고 타박하고는 일일이 한 잔씩 권해주시면서, 과년한 딸이 있는데 어디 좋은 사윗감이 없냐며 우리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시기도 한다.

아직은 그렇게 옆집 아주머니 같은 정겨운 맛이 있었는데, 얼마전 TV에 소개되고 나서는 가보지 않아 분위기가 어떤지 모르겠다. 발붙일 자리가 없다고해도 통영에 가면 물보라다찌 백여사님을 다시 찾게 되겠지?

배가 불러서 더이상은 못먹겠다는데 기어코 직접 깐 오도르를 일일이 입에 넣어주시던 백여사님이 생각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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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연한 기대감을 빼면 여행은 무슨 재미가 있을까?

그 옛날 시인 백석이 천희와의 만남을 기대하며 막연히 찾았던 통영.  그리고 그 이루어지지 못한 상실감으로 헤매던 것처럼 우리도 항남동 골목골목 대폿집을 찾아봤지만 헛수고였다.

언제나 인생이 그렇지만, 천희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막연한 기대감으로 살아가는 인생의 기억속에 그렇게 통영이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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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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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의 댓글

  1. 오.. 물보라… 저도 통영친구한테 물어봐서 간데가 여기였는데…
    그나저나 대양 노래방 안이 궁금해지는 맺음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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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거시기 … 천희가 백여사고 백여사가 천희 아잉교?

    갈 곳이 늘어나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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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아 다찌집 정말 가보고 싶었는데 여전히 못가보고 있네요.
    다음편은 대양편인가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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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통영이 예술인들의 고장이었네요.
    다시 찾아가게 될때면~ 예술적 에네르기를 충전하는 계기를 만들어 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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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군산 실비집, 마산 통술집, 통영 다찌집 한군데도 못 가봤어요. 정말 가 보고 싶어요.
    2편 얼른 올려 주세요. 독자들 목 빠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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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은 그 전부를 아우르지 않나요? 기장 꼼장어, 자갈치 시장, 서면 돼지국밥과 기장칼국수 기타등등 기타등등…
      부산도 가고 싶고, 통영도 가고 싶고 막 그런 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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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사진도 글도 넘~~맛깔스럽습니다!!
    정말 재미있게 잘 보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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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캬~~
    역시 좋군요.
    통영은 다찌죠. 암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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