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코팅의 솔직한 색 – Elmar 3.5cm


아버지께서 며칠간 위가 쓰리다 하셨다.

금방 괜찮겠지 했던 것이 조금 길어져 결국 검사를 다시 받아봤고 결론은 위염. 얼마전 대학원 동창들끼리의 제주도 여행에서 술을 좀 드신 것이 원인인 모양이다. 어쨌든 자극적인 음식을 피하고 당분간 죽을 드시라고 한다. 그 얘기를 듣고 아들로서 어찌 가만히 있을 수가 있나. 아버지 드릴 전북죽을 사오겠다며 사뭇 비장하게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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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단골인 전복집 주차장에 도착했다. 무료한 일요일, 하릴없이 뒹굴거리다가 더없이 훌륭한 핑계로 집을 나와서 탁 트인 바다를 바라보니 지끈거리던 머리 속에 시원해진다.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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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멀리 보이는 곳이 구룡포항이다. 흐린 날이었지만 바다는 비교적 잔잔했고 덕분에 갈매기들은 바위 위에서 편안한 일요일을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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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죽을 주문해두곤 다시 밖으로 나왔더니 막 어선 한 척이 들어와 멸치를 부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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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포가 기장이나 남해처럼 멸치잡이로 유명한 항구는 아니지만 이처럼 간혹 멸치가 들어오기도 한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멸치보단 고등어나 꽁치가 흔해 구룡포에서는 아직도 멸치액젓 대신 고등어로 젓을 담궈서 김장을 하기도 한다고 전복죽집 사장님이 얘기해줬다. 그 맛이 사뭇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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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마다 가득가득한 멸치들. 날씨가 추운 겨울이니 저 상태로 바로 회로 먹어도 될 것 같았다. 색색의 박스들은 엘마 렌즈의 색감 테스트용으로 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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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차 작업하시는 동안 서성이며 계속 셔터를 눌렀음에도 별 반응들이 없으셨다. 행색을 봐도 그렇고 손에 든 골동품 같은 카메라 꼬락서니를 봐도 별 시덥잖은 녀석이라 여겨지셨나 보다. 어쨌든 나로서는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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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파제 옆 작은 비닐 천막 안에선 어민들이 모여 참을 드시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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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먹었으니 커피도 한 잔! 인근 다방에서 커피 배달이 왔다. 조금 불건전하게 변질된 경우가 있어서 그렇지 커피를 배달시켜 마시는 나라가 또 있을까? 다방 문화에 대한 심도있는 고찰과 작업을 해보고 싶은 생각이 불쑥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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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파제 너머 테트라포드에는 언제나 낚시꾼들이 있다. 안테나처럼 솟아있는 그들의 낚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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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한 냄새가 진동하는 따끈따끈한 전복죽을 받아들고 가게를 나섰다. 가게 주차장 간판 위에는 자기도 한번 찍어달라는 듯 갈매기 한 마리가 포즈를 잡고 있었다. 차에 오르기 전, 마지막 한 컷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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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mar 3.5cm는 예상대로 상당히 낮은 채도와 콘트라스트의 결과를 보여줬다. 물빠진 듯한 밋밋한 색감을 보며 역시나 칼라 보다는 흑백에 어울리겠다며 단정지었던 것이 사실. 그렇게 첫 인상이 약했던 엘마로 찍은 이 칼라 사진들은 희한하게도 보면 볼수록 참 편안했다. 소박한 절집에서 정갈하고 간소한 공양 한 그릇 받아든 듯한 그런 느낌이랄까. 코팅의 꼼수도 없이 유리알 그 자체로 담아낸 빛이라 생각하니 왠지 마음까지 차분해졌다. 칼라로 다시 찍어볼 일은 없을거라 생각했었지만 날씨와 빛 상황이 다를 때는 또 어떤 느낌을 보여줄지 사뭇 궁금해진다. 흐릿하고 멍청한 색감으로 나올 수도 있고 기대이상으로 화사하고 세련된 색감으로 나올 수도 있을테고, 색온도가 훅 틀어지거나 완전히 엉뚱한 결과물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모두 괜찮다. 현행처럼 완벽하지 않기에 예상이 쉽지 않고 그래서 더 재미있는 것이 올드 렌즈의 매력이니까 말이다.

2016.12.04 포항

Leica M3 / Elmar 3.5cm F3.5 / Fujifilm C200 / I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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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의 댓글

  1. 피요님은 효자 노릇하는 와중에도 작품활동을..ㅋ
    잘 봤어요.. 전복죽도 땡기고 멸치찌개랑 회무침도 땡기네요..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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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재차 사용한 흔적으로 바랜 멸치 바구니의 색이 가슴깊이 파고드네요.
    부드럽고 온화한 색의 풍경입니다.
    효자이시네요^^
    (역시 아들을 낳아야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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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다음이 존나인가요?
    다시 엘마인가요?
    엘마도 존나만큼 존나요?

    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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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다방 문화에 대한 심도있는 고찰과 작업을 해보고 싶은 생각이 불쑥 들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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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장비는 거들뿐…
    글도 사진도 담담하면서도 재밌게…

    I’m a big fan of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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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효도 전복죽 배달 틈에 무코팅엘마 출사까지 겸하시는 고수의 발걸음은 역시 다릅니다.
    저도 다방 문화 참 좋다고 생각해요. 두 P고수님께서 협공으로 글과 고대하는 사진 올려주실거라 굳게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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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올드렌즈란 이런 것이다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무코팅인데도 꽤 좋아보입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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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전복죽 진짜 괜찮았어요. 제주도 보다 낫더라구요.
    엘마 얘기로 돌아와서
    사실 예전엔 이런 물빠진 색감 안 좋아했는데
    점점 이런 느낌이 좋아지네요.
    디지털도 그래서 약간 이런 느낌 나게끔 보정도 하구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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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쵸? 저도 제주도보다 구룡포 전복죽이 더 낫다고 봅니다. 또 언제 갈까요? ㅇㅅㅇ
      엘마 얘기로 돌아와서 ㅎ
      저도 예전같음 거들떠도 안봤을 거 같은데 너무 강하고 화려한 사진들로 눈이 고통받다 보니 이런 느낌이 참 편안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에 또 한번 찍어봐야겠어요.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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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제 생각은 후지필름도 한 몫 거들었다는 생각입니다. 코닥,후지,아그파 200짜리 셋 중에 후지가 가장 밋밋한 색을 내는 것 같다는 제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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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럴수도 있겠군요 ㅎㅎ 다음엔 코닥 칼라플러스200으로 한번 찍어봐야겠습니다. 그나저나 코닥에서도 슬라이드 필름을 다시 생산한다는데 후지에서 리얼라나 다시 내주면 좋겠어요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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