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청계천


2003년, 대학교 4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학군단 2년차 하계훈련 때문에 성남 문무대에 들어와있던 나는 몹시도 애간장이 타고 있었다.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이 추진한 청계천 복원 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청계고가가 철거될 예정이었고 그 날짜가 하필이면 하계훈련 기간과 겹쳐 버린 것이다. 훈련 들어오기 전부터 청계천 일대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어오던 중이긴 했지만 정작 청계고가 철거 장면은 찍지 못하고 ‘쓸데없는’ 공수훈련이나 받으며 몸이 묶여있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국방일보에 한토막씩 실려 있던 기사를 읽으며 빨리 4주가 지나기만을 빌었다.

나름 빡쎘던 고된 훈련을 마치고 학교로 복귀하자 마자 카메라를 들고 청계천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청계고가는 완전히 철거되지 않은 상태였다. 청계 8가 일대를 오가며 카메라를 겨누어 봤지만 공사장 칸막이에 가려 밑에서는 제대로 담을 수가 없었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했다. 청계고가 좌우를 따라 서 있던 삼일아파트로 들어섰다.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로 대표되듯, 날림으로 지어졌던 경우가 많은 당시 시민아파트들 대부분은 이미 안전등급 E등급의 붕괴 위험 진단을 받은 상태였고 청계천의 삼일아파트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청계천 복원 정비 사업이 진행되면서 삼일아파트 역시 철거될 수순이었고 이미 사람이 떠난 빈집이 많아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아파트라 믿을 수 없을만큼 을씨년하고 음산했다. 아파트에 들어섰을 때 괜시리 무섭기도 했지만 어쨌든 옥상으로 가야했다. 옥상으로 향하는 문이 개방되어 있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 계속해서 올라갔다.

옥상에 숨을 헐떡이며 도착하니 할아버지 한 분이 공사 현장을 내려다 보며 구경하고 계셨다. 카메라를 들고 불쑥 나타난 젊은 녀석이 불편하실만도 한데, 다가가 인사를 드리니 그리 놀라는 기색도 없으시다. 삼일아파트에 사시느냐 여쭈었더니 그렇다며 고향인 전주를 떠나 서울에 와서 정착했고 이 곳 삼일아파트에서는 30년을 사셨다고 하셨다.

30년을 살아온 집이 철거되는데 서운하지 않으시냐는 내 물음에 할아버지는 웃으시며 괜찮다고 하셨다. 의외였다. 삼일 아파트가 철거되도 갈 곳이 정해져 있다며 별 일 아니라는 듯 담담하셨다.  하긴 일제 강점기와 해방, 좌우의 혼돈과 동족간의 전쟁, 초고속 경제 성장과 가치관의 급변, 군사독재와 민주화까지… 백여년에 걸쳐 일어날 일들이 몇십년 동안 압축해서 이루어진 격변의 현대사를 겪어오신 산 증인이실 터인데 그깟 고가도로와 낡은 아파트의 사라짐이 무어 그리 대수일까. 어설픈 감상에 젖어 드라마틱한 이야기라도 들어볼까 유도 질문을 던져본 내가 부끄러웠다.

‘할아버지 사진 한 장만 찍어도 될까요?’

할아버지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시곤 청계천을 무심히 내려다 보셨다. 카메라를 들어 그 장면을 몇 컷 찍었다.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으셔 좋았다.

여든이 넘으신 할아버지는 이가 많이 빠지셔 발음이 불분명했다. 하시는 말씀을 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제법 긴 대화를 나눴다. 그러면서 음료수 하나 드리지 못한게 죄송스러 주머니에 있던 담배 한 갑을 내밀었다. 친구 녀석이 여자친구에게 걸리면 안된다며 한보루 채 내 자취방에 보관을 의뢰한 말보로 라이트였다. 양담배라 괜히 눈치가 보였지만 할아버지는 사양치 않고 받으셨다. 건강히 지내시라며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내게 할아버지는 엷은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어 주셨다.

학교로 돌아와 현상을 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더이상 청계천으로 나가지 않았다. 나로서는 이 정도면 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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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723-tmx-14_36-f3hp-1

2003.07.23. 서울

Nikon F3HP / ai-s 28mm f2.8 / Kodak TMX / Coolscan IVED

카테고리:Essay, uncategorized태그:, , , , , , , , , , , ,

1개의 댓글

  1. 아~~사진이 명박이…아니 대박이네요.
    ㄷㄷㄷ

    역사적 장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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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박LEE 덕분에 찍은 사진이네요. 사실 당시에도 청계천 복원에 관해 반대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만 지금은 상당히 성공적인 사업이었다 평가받고는 있지요. 물론 진짜 살아있는 하천으로서의 기능을 회복하지 못한 것에는 아쉬움이 남지만요. 하지만 그는 여기서 멈췄어야했지요.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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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좋은 사진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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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정말이지 대단하십니다!!! ㄷㄷ
    이런 역사적 사진이 있으셔서 뿌듯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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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냥 운이 좋았지요. 하필 올라간 옥상에 할아버지께서 계셔주셔서요. 개인적으로는 나름 가슴에 남는 한 컷입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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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그 날 이후로 나는 더이상 청계천으로 나가지 않았다. 나로서는 이 정도면 된 것 같았다.”
    정말 최곱니다. 더 이상의 사진은 없었을 거예요.
    점점 더 퐝지부가 무서워 집니다. 퐝 지하 어디 모여서 쪽집게 사진 과외받고 막 그러는거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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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계천에서 찍었던 사진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컷이긴 한데 그래도 좀 더 다닐걸 그랬단 아쉬움이 좀 남긴 합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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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올해 본 사진 중 최고네요. 남은 11개월도 끄떡 없을듯..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요. (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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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철거되는 청계천의 잔해와 할아버지의 무심한 듯 하면서도 회한 어린 표정이 지나간 세월의 이야기를 들려주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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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낡은 것은 사라지고 그래야 또 새로운 것이 생겨날 수 있겠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개인에게 감상이 없을리는 없겠지요.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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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사진 한장이 많은 걸 말해주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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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그 날 이후로 나는 더이상 청계천으로 나가지 않았다. 나로서는 이 정도면 된 것 같았다.’
    정말 그럴만큼 함축적인 사진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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