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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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동쪽 끝 – 홋카이도(北海道) 네무로(根室)에서의 어느 밤, 동네 선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숙소로 갔습니다. 현관에 들어서는데, 한쪽에 앉아있던 남자가 말을 건네왔습니다.

저는 일본어를 거의 못합니다. 말을 건네온 남자는 한국어도 영어도 거의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남자는 어떻게든 얘기를 나누고 싶어하는 눈치였습니다. 제 말도 안되는 일본어를 듣더니, 휴대폰으로 영어사전을 실행하고 띄엄띄엄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차라리 그 편이 낫다고 생각한 것 같았습니다.

“저는 오사카(大阪)에서 왔어요.”
“멀리서 왔네요. 여행을 온건가요?”
“아니요. 일자리를 찾아 왔어요.”
“일자리요? 배를 타거나 그런?”
“목장에서 일하려구요.”
“그렇군요. 홋카이도의 목장일이 좋은가봐요.”
“그런건 아니에요.”

잠시 망설이던 남자는 얘기를 이어갔습니다.

“오사카에 아내와 딸을 두고 왔어요.”
“아, 그런가요.”
“저는 오사카의 빠칭코에서 일을 했었어요. 좋은 일도 있었지만 나쁜 일도 많았죠. 결국 아내와도 별거하게 되었어요. 오사카에서는 더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는데, 빠칭코 손님 한 분이 홋카이도에 오라고 하셨어요. 자기 목장에서 일해보라고.”
“그래서 목장일을 하게 된거군요.”
“아직은 몰라요. 오늘 면접을 봤거든요.”
“홋카이도가 맘에 드나요?”
“사실 아니에요. 딸이 보고 싶을 거에요.”
“…”
“…”
“오사카는 무척 멀잖아요. 다녀오기 쉽지 않을텐데요. 딸이 보고 싶으면 어쩌죠?”
“글쎄요. 저는 돈을 벌어야 하고, 딸은 오사카에 있어야 해요.”

문득 보니, 남자는 커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술은 더 이상 마시지 않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고개를 들었다가 부엌 한구석에 놓인 커피 그라인더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제가 커피를 만들 줄 아는데, 한 잔 해드릴까요?”
“아, 고마워요.”

육중한 그라인더에 커피를 넣고 갈아냈습니다. 적당히 세월의 흔적이 쌓인, 흐름 좋은 동주전자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커피를 내려 남자에게 건넸습니다.

“…”
“…”
“맛있네요.”
“고마워요. 딸과 떨어져 지내야 한다면 무척 슬플 것 같은데, 괜찮겠어요?”
“그런게 사는 거잖아요.”
“그렇군요.”
“…”
“…”
“저는 이제 나가서 산책을 좀 할게요.”
“아, 그래요. 저는 이 캔만 마시고 자러 갈게요.”
“그래요. 잘 자요. 좋은 여행이 되기를 바랄게요.”
“고마워요. 행운을 빌게요.”

“안녕히.”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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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의 댓글

  1. 가슴 답답한 슬픈 현실이군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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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가슴 울컥하게 만드는~ 한 단편이었던거 같아요.
    홋가이도의 밤은 그렇게 깊어 갔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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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옛날이나 지금이나 제가 지키고 앞으로도 지켰으면 하는 원칙중 하나가 “가족은 함께 살아야한다”입니다.
    저 사내의 딸이 많이 보고 싶을거란 말에서 그 슬픔이 느껴져 맘이 불편한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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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새로운 목장일이 어떨지 모를 두려움.. 가족과 떨어져지낼지도 모를 슬픔
    사내의 복잡한 심경에 마음 담아 직접 내려주신 커피가 작지 않은 위로가 되었을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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