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카메라


80년대 여느 평범한 집과 마찬가지로 내 아버지의 장롱 한 켠에는 단정하게 모셔진 ‘아빠 카메라’가 한 대 있었다. 카메라는 어린 시절 하루가 다르게 크는 나의 모습을 지켜봤고, 천진한 국민학교와 까까머리 중학시절의 모습을 차곡차곡 기록해 주었다. 사진이 귀하고 카메라가 흔치 않던 시절이라 장롱 속 ‘아빠 카메라’를 간혹 구경만 할 뿐, 감히 빌려 쓴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뽕밭이 푸른 바다로 변한 것 마냥 그렇게 귀한 대접을 받던 카메라가 요즘은 정말 흔해 빠졌다. 일반인들에게 한때 진지하고 근엄하기만 했던 사진의 지위는 디지털의 풍요로 말미암아 손쉽게 즐기고 함께 소비하는 유희와 놀이로 바뀐 것이다. 디지털 세대인 우리 아이 역시 핸드폰으로 촬영하거나 아빠 디카를 빌려 찍는데도 전혀 거리낌이 없다. 강산이 변하긴 변했다.

아마도 사진 찍는 아빠들의 로망 중 하나는 바로 아이와 같이 취미를 공유하는 것이리라. 나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아이가 카메라를 다룰 수 있을만한 적당한 나이가 되길 기다려왔다. 그리고 아이가 열살이 되는 올해 떠나는 일본여행이 바로 기다려왔던 바로 그때라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짐을 꾸리는 와중에 아들에게 편하게 찍어보라며 ‘아빠 카메라’를 하나를 쥐여주었다. 내 출퇴근 메이트인 RICOH GRD2였다. 삼분할 구도, AF 잡는 법 따위가 무슨 소용이며 당췌 무슨 의미가 있나. GR의 흑백모드에 2.5m 고정 매뉴얼포커스로 셔터만 누르면 촬영이 되게끔 세팅하고선 아이에겐 그저 ON/OFF하는 법과 이거 누르면 사진 찍힌다고 셔터버튼 위치만 알려주었다. (생각해보니 재생하는 법은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찍은 사진 리뷰?하고 있더란.. 과연 디지털세대답다)

 

여행 당일 출발지인 대구공항에서 아이에게 ‘아빠 카메라’를 건네주었다. 그 후 나는 나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각자의 카메라를 통해 여행지의 낯섬을 기록했다. 아빠의 욕심만큼 이 녀석이 사진에 큰 흥미를 보이는 것 같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옆에서 보채거나 나무라지 않았다. 그저 마음가는대로 찍고 싶은게 있으면 찍고 아니면 말아야지 하며 전적으로 아이에게 맡겨두었다. 그렇게 5박 6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아빠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열어보았다.

기록된 사진은 총 163장.

여행 첫날 후쿠오카에서 가고시마까지 신칸센으로 이동 간에 담은 사진이 절반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이가 찍은 사진들을 밝은방에 불러들인 후 쭉 살펴보니 괜찮은 사진들이 보인다. 로우앵글, 흔들리고 기울어진 프레임, 교묘한 밸런스감까지 거리사진의 문법을 녹아있는 컷들 위주로 12장을 골랐고, 아이의 관점을 최대한 존중하는 차원에서 기본적인 노출보정과 소극적인 트리밍 외에는 손을 보지 않기로 했다. 내친 김에 고른 사진을 아이에게 보여주며 제목을 붙여달라 부탁했는데, 의외로 술술이다. 아이가 직접 붙인 제목은 사진 하단에 기입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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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학교..일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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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으로 찍은 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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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진을 찍는데 한 사람은 졸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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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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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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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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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봇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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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호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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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타고 서울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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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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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버스 표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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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라지마섬과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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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아이가 찍은 사진을 셀렉하면서 기분이 무지 좋았다. 이유인즉, 아이가 촬영한 163장 중에 엄마 사진은 기껏 1~2장밖에 없는데 반해 아빠 사진은 무려 30장을 육박했던 것이다. 올ㅋ. 5장 중 1장은 아빠를 찍은 셈이다.

사진을 찍는다는 행위는 결국 대상에 대한 애정을 담보로 하기 마련이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간에, 현실의 무한히 연속된 시간과 공간에서 사진의 프레임으로 재단하는 그 순간은 여지없이 셔터를 누르는 이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한 찰나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이다. 아들의 사랑을 독차지한 순간이 30번도 넘다니.. 낳아준 당신은 고작 1~2장 밖에 없고 말이지 ㅋㅋㅋ

착한 각도와는 대척점에 있는 로우앵글이라 준수한 실물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음을 다들 인지하실거라 믿고 아들 사랑에 대한 증거로써 B급 사진 한 켠에 ‘아빠 카메라’에 담긴 아빠 모습을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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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photographed by Ricoh GRD2

 

카테고리:Drifting, Essay태그:, , , , , , , ,

1개의 댓글

  1. 좋은 사진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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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정말 글도, 사진도 너무너무 좋아서 감동입니다. 사랑하는 버스 표지판들이 인상적이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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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가 어느덧 혼자 카메라들고 사진찍을 수 있다는것에 저도 감동했었어요.
      글에 쓴 것처럼 자연스럽게 사진과 가까워지고 같이 사진으로 이야기 나눌 수 있길 기대하고 있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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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이쁜 사진과 이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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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보는내내 왜 나도 흐뭇한 미소 지으면 계속 보게 되었네…
    정말 최고의 아빠사진가에 그 아들이야…
    많이 부럽다…
    내가 사진찍는 거 그리 안좋아하는 영운이에 비하면 정말 부러운 일이야…
    앞으로도 계속 부러운 좋은 작업 함께하면 좋겠고..
    나도 노력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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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들래미들이 다 그렇지 뭐
      어르고 달래가면서 해야지 별 수가 있나 ㅎ
      가까이든 멀리든 어디 여행갈때면 GRD2 손에 쥐여줘봐야겠어. 놀이삼아 카메라랑 친해지길 바래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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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아이가 저보다 사진을 잘 찍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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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주아비님과 콴제이님은~ 서로 묘하게 닮아 보이신다능~ ^^;
    (서로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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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언제나 가족과 함께 사진을 찍고 싶다는 꿈을 꾸곤 합니다. 그러나 카메라를 직접 손에 쥐어줘 봐도 금방 싫증을 내더군요. 아, 싫증보다는 꾸준히 찍지 않습니다. 주아비님처럼 이렇게 구체적이고 쉬운 방법으로 촬영을 놀이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었군요.
    무엇보다도 엄마보다 약 15-30배 관심을 받으셨다는 사실이 부럽습니다^^
    부자간의 관계가 애틋해 보입니다. 이쁜 사진에 재치넘치는 제목들이 눈에 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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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부취미로서 사진의 가장 큰 장점은 단연코 (상대적으로 고퀄의) 가족사진을 (그것도 아주 다량으로) 남길 수 있다는 거라고 생각해요. 이렇게 생산적이고 흥미로운 취미를 혼자만 즐기기보단 아들에게도 알려주고 싶은 맘도 크고요. 작년 말에 노출계 겸 들인 grd2 부담없이 건네줘봤는데 그럭저럭 가지고 놀더라구요. 사진이 낯선것이 아닌 손쉽게 찍고 또 즐길 수 있다는 점만 알려줄 수 있어도 성공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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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아빠를 닮아서인지 무심코 찍은 컷들에서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느껴집니다. 좀 지나면 M6 내놓으셔야겠네요. 아 물론 그 핑계로 새로운 걸 지르시는거죠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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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처음 버스 정류장 사진 보고는 주아비님 처럼 사진 참 깔끔하네..
    라고 생각하며 봤어요.
    꼬마가 찍었다니 쿵
    철길 사진도 좋고 제목까지..
    아빠와 아들이 사진으로 소통하고 가까워 질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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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정해보이는 표지판에 시선이 이끌렸나봅니다. 제목 술술 붙이는 거보니 엄마 졸라서 장비 좀 사주고 그러면 금세 빠져들법도 할거 같아요.
      저도 좀 같이 얻어쓰고 싶어서 이러는건 아닙..;;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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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부럽네요.
    제 아이는 이제 모델 혹은 피사체 절대 거부입니다.
    찍는 건, 찍지만, 자기가 안 찍히기 위해 절 안 찍는……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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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재밌고 감동적인 사진과 글이군요!!
    부자간에 취미가 같으면 참 좋겠지만 그건 우리의 욕심이고, 또 아들이 좀 더 커서 저같이 장터에서 살면~~ㄷㄷ ㅋㅋㅋ
    하여간 넘 부러운 글과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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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들이 장터에 살면 애미가 팍팍 지원해줄테니 저도 좀 얻어쓰고 뭐 그러는…ㄷㄷ
      나름 첫단추는 성공적이었다 자평하면서 다음 기회를 노려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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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아!! 무척 사랑스러운 포스팅입니다. 너무 사랑스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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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저도 아이가 카메라를 소중히 다룰 줄 아는 시기가 오면 카메라를 하나 선물할까 합니다. 너무 멋진 사진들 잘 봤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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