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색깔


인지과학이라는 분야가 있는데, 이게 무엇이냐 하면 인간의 모든 기억, 사고, 감각, 판단, 감정 등등의 분야를 해부, 생리, 병리적으로 해체하여 설명해낸다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한다면 예전 유명했던이상구 박사의 ‘웃으면 엔돌핀이 나온다’라는 식의 이야기랄까? 우리가 추상적으로만 생각하던 우리의 대뇌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에 관해서 설명을 해내는 학문이다. 가끔 진료실에서 우울증을 앓는 환자들의 보호자들과 상담을 하면서 언급을 하곤 하는 말인데, 위의 이상구 박사 이야기를 하며,

“만일 우리 몸에 무언가 병이 생겨서 엔돌핀을 분비하는 기관이 말을 듣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기쁜 일을 경험해도 엔돌핀이 부족하니깐 우습지도 않겠죠? 그럼 어떻게 돼요? 당연히 세상만사가 우울해지는 거에요.”

라는 말을 하곤 한다.

사실 우리가 느끼는 소중하고 고귀한 감정들을 이렇게 해체해버리면 참으로 허망하다는 느낌도 드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러한 안타까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제는 이러한 인지과학이 정신분석의 분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선천적으로 양심이 없고 자기 멋대로 지내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대뇌의 어떤 특정 신경전달경로가 과대증식되어있어서 과도한 활동을 하게 되고 이로 인해 많은 생체 내 신경전달물질이 우리가 어떠한 성격을 형성하게 된다는 식이다. 반대로 과도하게 자기양심적이고 법을 지키길 좋아하고 매사에 깔끔한 걸 좋아하는 사람은 대뇌의 또다른 어느 부분이 과다 활성화 되어 있고 그 기관에서 내뿜어내는 신경전달물질들이 우리가 원초적인 욕망대로 활동하도록 도와주는 A라는 기관을 통제하게 된다는 식. 잔인하게 말하자면 사람의 성격이라는 것, 인격이라는 것이 결국 대뇌 특정기관의 기능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신경전달물질이나 뇌파, 호르몬 등의 합이 되어버린다.

A: 슈퍼앵글론 21미리 렌즈를 사용해봤는데 현행 뺨치게 샤프하고 콘트라스트도 강하고 컬러도 상당히 매력적이야..
B : 슈퍼앵글론 21미리 렌즈는 현행에 비해서 아무래도 컨트라스트도 떨어지고 샤프니스도 떨어지더라. 색도 우중충해..

둘중의 누구 하나는 거짓말을 하거나, 어디서 주워들은 말을 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둘 중의 누구 하나는 객관적인 말을 하고 다른 하나는 막눈인걸까? 사실 위의 두 말이 다 맞을 수도 있고 또한 틀릴 수도 있다. 분명 객관적 차이라는 건 존재하게 마련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감각구조 또한 거짓말을 잘하기 때문이다.

사실 -> 감각 -> 신경 -> (변연계:Limbic System) -> 대뇌반구

우리는 많은 판단을 우리의 대뇌가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상 대뇌반구는 변연계라고 하는 조직이 떠주는 숫가락을 받아먹기만 하는 존재일 뿐이다. 왜 일생에 있어 어떤 순간, 어떤 장면은 단 한 번 보았을 뿐인데도 죽을 때까지 잊히지 않고, 또, 한편으로는 명절때마다 어느 소원한 친척식구의 집을 찾아가는 길은 왜 갈 때마다 헷갈리고 안외어지는걸까? 이걸 난 감정의 색깔(emotional coloring)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른바 하나의 경험에 하나의 감정의 색깔을 입히는 작업이다. 일상적 경험을 하더라도 총천연색의 화려한 색깔을 입혀놓으면 (즉, 강렬한 감정적 동요가 있다면) 그것은 죽을때까지 잊혀지지 않으며, 또 반대로 우중충한 어떤 색을 그려놓으면 (별다른 감정적 동요도 자극도 없다면) 잘 외어지지 않고 금방금방 망각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어떤 경험을 할 때, 순간순간의 느낌들, 감정들이 바로 그러한 색깔을 결정하게 된다. 이런 것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이 바로 정치인에 대한 선호이다. 객관적 사실이나 논리적 옳고 그름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거다. 그냥 좋으니깐 다 옳게 보이고 싫으니깐 다 거짓말로 보이는..

처음 라이카라는 카메라를 한 대 구입하여 처음으로 필름을 집어놓고는 처음으로 현상을 해보고 또 인화해서 예쁜 인화지에 내가 촬영한 사진을 받아들 때의 그 느낌.. 그 설레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 일상의 남루한 하나의 일일 뿐이지만 그 설렘과 두근거림이 일생의 잊을 수 없는 기억들로 남을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렌즈를 사용하면서 받는 느낌이 사람마다 천양지차로 다른 이유는 뭘까? 바로 그 때문이 아닐까? 사실 객관적이라는건 우리의 감각기를 통하는 과정에선 무용지물이 되고 마는 것이다. 똑같은 사진을 보여줘도 전혀 다르게 볼 수 있고 판단 또한 달라질 수 있다.

이런건 비단 사진 한장과 나와의 관계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사진관련 커뮤니티에서도 게시판을 통해서 누군가 사진을 남기고 이걸 어떻게 찍었느니, 어디서 찍었느니, 그리고 어떤 렌즈를 사용했느니 따위의 말을 남기면 우리들은 서로 왁자지껄 모여들어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그리고 거기에 무수한 댓글이 달리는 광경을 보다 보면, 이건 사진이나 렌즈에 대한 토론의 장이라기보다는 뭐랄까? 각자가 경험했던 그 소중한 감정을 서로 나누는 감정교류의 장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곤한다. 사진이나 렌즈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에 대한 이야기 말이다. 어찌 보면 커뮤니티라는 것이 생명력을 이어갈 수 있는 원동력이라는 것이 거기서 나오는 건 아닐까싶다. 우리의 마음을 주고받는 과정을 통해서 말이다.

805psydy_0009

내가 사랑하는 주미크론 50밀리 DR 렌즈로 촬영했던 사진. 이 사진을 찍던 그때는, 아마도 내 인생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안타까운 순간이었고 또한 아련하고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그래서 난 이 렌즈를 사용할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한다. 이 렌즈의 성격은 그런 거라고. 아마도 우리가 렌즈에서 받는 느낌이 이런 게 아닐까? 사실 British Journal of Photography의 에디터였던 Geoffrey Crawley의 지대한 공로로 렌즈 테스트라는 것이 광학적 능력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으로 바뀌었다지만 나는 여전히 옛 방식을 선호한다. 해상도나 콘트라스트나 왜곡 따위의 객관적으로 평가되어질 수 있는 그러한 것들 보다 그것이 총채적으로 어울어지면서 느껴지는 인상같은 것 말이다. 이 렌즈는 차가워. 이 렌즈는 화사해. 이 렌즈는 묵직해 따위의 이야기들. 어차피 인간의 눈은 엄격한 환경에서 1:1 비교테스트를 하지 않는 한 렌즈 간의 차이란 건 쉽게 발견하지 못하는 법이다. 그런데도 렌즈에 대한 나의 느낌을 해상력이나 콘트라스트나 주변부 화질 같은 수치로 변환한다는 것은 왠지 나의 소중한 추억을 단백질 조각으로 치환하는 것만 같다. 그러니 무엇을 하건 자신의 감정과 자신의 기억에 충실한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무언가와 비교하는 순간 즐거움은 괴로움이 되는 법이니 말이다.

ps. 2006년 라이카클럽에 썼었던 옛날 글이네요. 오랜만에 이곳에도 다시 옮겨적어 봅니다.

카테고리:Essay

1개의 댓글

  1. 감정에 색을 입힌다는 개념이 직관적이고도 손쉽게 이해됩니다. 어쩌면 사진을 찍어나가는 과정도 점점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고 그 솔직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사진으로 담아내기 위한 여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수없이 노출된 이미지들에 의해 학습된 이른바 ‘좋은 이미지’를 내 카메라로 확대 재생산하는 것이 아닌 내가 컬러링한 감정의 색을 카메라로 옮겨담는 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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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감정의 교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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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좋은 글 감사합니다. 무엇을 하건 자신에게 ‘충실해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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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공감가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어쩌면 철저히 혼자 가거나 치열하게 객관화 해야만 만족할 수 있는 작업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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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소통은 대략 생각과 감정을 나누는 과정이지 사실의 전달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대뇌작용에 대한 글들을 자주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단, 쉽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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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하나의 경험에 하나의 감정의 색깔을 입힌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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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여러번 읽고 이제야 답글을 답니다. 두고두고 또 읽어 보려구요. 좋은 글 너무 감사합니다.
    (담에 만나면 뽐뿌 그만 주시고 이런 좋은 얘기를 많이 해주세요 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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