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로우 마린


나는 내성적이다. 확실히 여럿보다는 혼자가 편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혼자서도 잘 논다. 그리고 걷는 걸 좋아해서 가족여행은 물론이고 출장지의 피곤한 아침에도 빠뜨리지 않고 주변을 산책하곤 한다. 이런 내게 사진은 그야말로 소울메이트! 좀 더 일찍 알지 못한 것이 늘 후회스럽다. (총각 때였다면 장비라도 세팅해놨..응?)

카메라를 메고 현관을 나서면 일상은 모험이 되고, 익숙했던 동네는 어느새 호기심 넘치는 탐험지로 변모 해 있다. 여행작가이자 소설가인 피코 아이어는 “여행의 묘미는 불확실함 속으로 뛰어드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 카메라는 내게 정적인 삶으로부터 과감하게 불확실함 속으로 뛰어들게 해주는 용기를 불어넣는다.

지난 3월 1일, 카메라를 메고 동빈내항 쪽을 걷다가 포항함 전시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박된 선체 주변을 돌며 몇 컷 찍고, 함선 내 철로 만든 개미굴 같은 좁은 통로를 오르내리며 몇 컷 더 눌렀다. 필름을 갈아 끼우고 벤치에 앉아 잠시 한숨 돌리는 사이 건장한 체격에 베레모를 눌러 쓴 아저씨 한 명이 포항함에 오른다. 이거 뭔가 그림이 나올 것 같다는 직감에 앞뒤 가리지 않고 따라붙었다. 가까이서 보니 이 아저씨 군화까지 신었다. 퇴역군인인걸까? 문득 이 분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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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M-1

leica m6, uc-hexanon 35/2, ilford h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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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장한 체격과 달리 내딛는 걸음은 다소 힘에 부쳐 보였다. 그는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걸어 함 내에 마련된 ‘천안함 전사자와 한주호 준위 추모실’에 당도하였다. 이 장소는 원래 장교들 회의실로 사용되던 공간이었으나, 천안함 희생자를 위한 추모공간으로 리모델링된 것이었다. 주변을 잠시 둘러보던 그는 갑자기 정자세를 취하며 어디에 그런 기합을 숨겨놓았던지 큰 소리로 한주호 준위 추모 사진을 향해 힘찬 경례를 올린다.

“Semper Fi”

정적 속 급작스런 경례소리에 주변의 어리둥절한 시선들이 잠시 모였다 이내 흩어지고 만다. 눈시울이 젖어드는지 그는 연신 손등으로 눈가를 훔친다. 마침 내 가방에 물티슈가 있어 서너 장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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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M-2

leica m6, uc-hexanon 35/2, ilford h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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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에서 죽은 군인이 가장 영광스럽지”

목적지 없는 그의 말은 적적한 추모의 공간을 맴돌았다. 나는 좀 더 다가가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옅은 소주 냄새가 코 끝을 스친다. 내가 이야기를 들어 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 확인한 그는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낸다. 지난 주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했으며, 포항이 고향이나 집안 사정으로 13세 때 미국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그 후 미 해병대에 입대해 월남전에 참전하였고 제대 후 이민자로서 치열한 삶을 살며 미국땅에 뿌리내렸다고 한다. 그리고 나이 60을 넘긴 이제서야 해병의 도시이자 고향인 포항에 비로소 돌아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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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ica m6, uc-hexanon 35/2, ilford h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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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포항함을 빠져나와 죽도동 쪽으로 걸었다. 아치 모양의 동빈다리 언덕배기에 잠시 멈추고서는 주머니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낸다. 송도 바람에 흔들리는 라이터 불을 손등으로 잘 감싸 불을 붙인다. 담배를 문 그의 눈빛은 무척이나 외로워보였다.

“자네 잠깐 소주 한잔 할 시간되는가?”

손목시계를 보니 한 시간 정도 여유가 있다. 아직 늦은 오후라 본격적인 술집은 아직 일렀고, 일전에 친구랑 들렀던 육거리 밥집으로 향했다. 대충 자리를 잡고서 김치찌개 백반에 맥주 두 병을 주문했다. 그에게 조금 버거워 뵈는 소주 대신이었다.

보글보글 찌개를 사이에 두고 그의 60년 인생이야기가 건너온다. 현재 일하고 있는 회사이야기, 20대 후반 나이가 차서 결혼하기 위해 대구에 와서 선 봤던 일, 결혼하고 신혼살림 차릴 집 구하며 생긴 웃지 못할 에피소드, 그 때 낳은 아들이 어느덧 자라 대학 졸업하고 취업 준비하고 있다는 말씀 등 맥주 잔 주거니 받거니 하며 유수 같은 세월이 흐른다.

수심 잔뜩 고여있던 그의 눈빛이 꽤나 부드러워졌다. 과연 천국보다 낯술인게다. 나로서는 ‘이민자의 한’이 어떠한 것인지 그저 더듬더듬 넘겨짚어볼 뿐이지만, 적어도 그는 타국에서 겪어낸 인생 역정의 한을 육거리 소박한 밥집에서나마 잠시라도 뱉어낸 듯 보였다.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는 가능한 한 카메라를 들지 않고 두 귀를 오롯이 열어두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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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ica m6, uc-hexanon 35/2, ilford h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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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는 소심한 나를 쳇바퀴 일상으로부터 모험의 세계로 이끌어주는 쾌활하고 용기 넘치는 멋진 친구다. 이 친구의 손을 잡으면 어디든 갈 수 있을 것만 같고, 언제나 떠나고 싶어진다. 이 친구가 아니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멋진 곳 아름다운 시간 그리고 좋은 사람들이 결코 적지 않다. 카메라는 내게 말 동무이자 여행 안내자이며 누구보다 믿음직한 기록자이다. 이 친구와 함께 내일은 또 어떤 미지와 조우할 수 있을지 자못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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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Essay, uncategorized태그:, , , , , , , , , , ,

1개의 댓글

  1. 퇴역 군인의 삶이 궁금합니다.^^
    새 연장 축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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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엄청난 섭외력으로 조금 더 다가가셨군요. 낯선 사람과의 소주 한 잔. 멋있는 작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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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두어차례 읽고서 댓글을 답니다. 결국은 사람인가봅니다. 이야기가 있는 사진과 글 너무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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