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몇번이라도


가까운 곳, 주변의 모습은 익숙한 탓에 새롭게 바라보기 쉽지 않다.

 

익숙한 곳에서 긴장된 시선과 감정을 유지하며 프레임을 짜기란 그래서 의외로 어렵다. 물론 사진찍는 이들은 누구나 등잔 밑이 어둡다는 이 맹점을 잘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 찍지 않아도 내일 찍으면 되는 그런 장면 앞에 절박한 감정은 들 수가 없다. 그게 솔직할게다. 머리와 가슴이 일치되는 것은 사람의 영역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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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가 있는 공단을 내려가면 개천을 건너는 다리가 하나 나온다. 이 곳을 지나야 정말 퇴근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곳이다. 해질 무렵이면 개천 너머 너른 들판 위로 석양이 멋지게 비치는 이 곳을 지나며 언젠가는 한번 찍어야지 하던게 벌써 10년이다.  나름 붐비는 퇴근 시간대에 이 곳에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고 있자면 퇴근하는 동료들이 나를 보기 십상이라 괜시리 신경이 쓰이지만 그래도 이 날은 찍어보기로 했다. 보가 있어서 이 가뭄에도 수량이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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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더 몰고 나와 보리를 막 수확한 밭 언저리에 이르렀다. 생각보다 너른 들이 많지 않은 경상도에서 이정도면 제법 평야라 부를만하다. 형산강을 끼고 있는 경주에는 건천과 안강 등 여전히 절대 농지로 묶여 있는 풍요로운 곡창이 자리하고 있다. 신라의 도읍으로서 경주의 입지는 훌륭한 편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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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개수로 옆 길을 따라 사람들이 제법 뜨문뜨문 오고 갔다. 이런 곳에서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낯선 이를 보고 모두가 의아하게 쳐다본다. 그래도 오늘은 ‘땅 보러 왔는교?’, ‘여기에 길 난다 카든교?’ 따위의 질문은 받지 않았다. 개발이 되고 땅값이 오르길 바라는 것이 하릴없는 시골 사람들의 가장 큰 꿈이 되버린 시대인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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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 수확이 끝난 밭에는 물이 들어가고 있다. 며칠 후면 이 곳에 벼가 빼곡히 심길 것이다. 서양인들의 눈에는 지극히 동양적이고 또 그들의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이 반영된 농촌 풍경의 상징과도 같은 논. 나는 논을 볼 때 마다 새삼 경외로움을 느낀다. 연중 무덥고 강수량이 풍부한 동남아와 비교해 기온과 강수량이 들쭉날쭉한 동북아 끄트머리의 우리는 다를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거친 땅을 개간하고 먼 곳의 물을 끌어와 벼를 심었던 우리 조상의 땀과 눈물이 찰랑찰랑 담긴 것이 논이 다.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 황무지에 내던져졌어도 우리는 그 곳에 논을 개간해 내고야 말지 않았던가. 돈 안되는 쓸모없는 땅 취급 받는 논은 그래서 더 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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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녘의 낮은 빛이 기대이상의 풍부한 톤을 만들어줬다. 해상도, 콘트라스트 모두 낮은 1949년산 구닥다리 Elmar 3.5cm지만 가끔씩 이런 사진을 만들어주니 미워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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찍을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만 사진을 보다 문득 많이 외로워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큼발랄한 봄을 지나 뜨거운 여름이 다가오고 있는데 가을을 타는 듯한 심리적 상태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 제법 오래다. 까칠하고 독하다는 소리를 회사에서 주로 들어왔지만 사실은 유리 멘탈인 나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선공을 날려왔던 것인데, 이미 여기서의 내 이미지는 그렇게 굳었다. 속한 집단에 따라 다른 모습을 가진 것이 비단 나뿐이겠냐만 이렇게 너른 하늘 아래 혼자 서면 문득 울컥해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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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몇번이라도, 담을 수 있는 장면이고 장소였지만 최근에야 나는 회사 인근 촌동네 건천을 필름에 담아오고 있다. 조금 더 관심을 기울이자 새로운 모습이 보이고 새로운 장소가 보이기 시작한다.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이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자 복이다. 허투로 지나칠 장면은 없다. 모두가 지나고 나면 소중한 것들… 언제나 몇번이라도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언젠가는 더이상 만날 수 없으리라. 주변의 모습에 셔터를 누를 때 마다 그 슬픈 시한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와이프와 연애할 때 어디선가 주워들었던 금 이야기를 써먹은 적이 있다. 세상에 소중한 금이 세 가지가 있는데 ‘변치않는 황금’과 ‘생명을 유지해주는 소금’ 그리고 ‘너와 함께 있는 지금’이란 오글거리는 멘트였는데 나름 반응은 괜찮았… 어쨌든 ‘지금’은 쉬이 흘러보낼 수 있는 사소한 일상이겠지만 언제나 몇번이라도 계속 될 수는 없는 그 유한성을 생각하며 그래, 오늘에 더 충실하자며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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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25. 경주 건천

Leica IIIa / Elmar 3.5cm f/3.5 (coated) / Kodak 400TX / I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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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요새 이래저래 바쁘고 힘들다는 핑계로 매거진에 완전 소홀했습니다. 반성의 의미로 넋두리를 끄적여 보았으니 괘념치 마소서. 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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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의 댓글

  1. 포스팅의 정석같은…ㅎㅎㅎ

    Liked by 2 people

  2. 읽고나서도 한동안 울림이 쉬이 가시지 않을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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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이렇게 맛난 글과 사진이라니…
    쵝오에요.

    Liked by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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