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척


야간자습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버스 안은 같은 처지의 고등학생들로 노상 붐볐다. 요행히 내가 이용하는 정류장은 상류(?) 쪽이라 원하는 자리에 앉을 수 있었는데, 주로 맨 뒷자리 창가 자리를 선호했다. 경주를 벗어나 시외국도를 달릴 때 버스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청량한 밤공기가 좋았기 때문이다. 밤 늦은 버스는 정류장을 하루 종일 학교에서 시달려 저항할 기운도 없는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집어삼킨다. 그렇게 게걸스런 입석버스는 시내를 벗어날 즈음 소화불량에 걸릴 듯 과식하기 십상이다.

지정석에 앉으면 같은 정류장에서 친구와 버스에 올라 집까지 서서 가는 여학생이 있었다. 작지만 하얀 피부에 검은 단발머리가 무척 잘 어울리는 귀여운 친구였다. 어느때부터인가 나는 창가 풍경보다 그 친구를 바라보는 일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집은 금척이었다. 숫기 없던 나였지만 그 친구에게 말 한마디 못 건네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순 없다는 절박한 심정이 들었던 것인지 하루는 그 친구와 함께 한번도 내려본 적 없는 금척리 정류장에 대책없이 내려버렸다. 비가역적 상황에 몰려버린 이상 나는 드문드문 가로등에 의지해 집으로 가는 그녀를 십 미터 가량 거리를 두고 조심스레 뒤따를 뿐이었다. 가슴은 쿵쾅거리며 두방망이질 쳤다.

‘뭐라 말 걸지?’

‘무서워하진 않을까?’

‘용기내서 말했는데 거절하면 어쩌지?’

이 생각 저 생각에 머리가 점점 복잡해진다. 나를 의식한 건지 그 아이의 발걸음이 약간 빨라지는 것 같기도 하다. 긴장되는 내 맘도 모르고 저 멀리 약간의 메아리를 업은 개 짖는 소리는 늦은 밤 적막한 시골길에 음산함을 덧입혔다.

아까 정류장에서 내려 이 낯선 동네를 얼마나 걸은 걸까? 그 친구 집은 제법 동네 깊숙이 위치한 듯 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 들어왔다면 이제 곧 집에 도착할 것이다. 목적한 바 실행을 위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은 걸 직감했다. 그러던 찰나에 나는 그만 철문이 ‘철컹’하고 열리는 소릴 들었다. 그리고 이어서 들리는 철문 닫히는 소리는 혼자만의 로맨스가 이것으로 종쳤음을 명료하게 확인시켜 주었다.

***

얼마 전 피요님이 메신저를 통해 사진 몇 장을 보여주었다. 금척리 고분군을 제주오름 마냥 맛깔나게 찍은 사진이었다. 금척, 참 오랜만이다. 그새 20년인가? 문득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이 일었다. 한여름 밤의 꿈 같은 기억 때문일까? 그 곳을 다시 걷고 싶어졌다.

오래 지나지 않아 노동절 쉬는 날 부모님 댁에서 하루 자게 되었는데, 촌집이 금척에서 불과 2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곳이다. 실제 거리는 사실 지도를 보고나서야 알게되었는데 생각보다 가까워 놀랐다. 네비로 최단거리를 검색해보니 농로로 안내를 한다. 보통 차로 갈 때는 가지 않는 길이라 다음 날을 위해 코스를 숙지해두었다.

해가 제법 길어진 오월의 아침, 생전 처음 걷는 농로를 따라 금척으로 향했다. 바지런한 촌로는 식전부터 밭을 살피고 젊은 청보리는 바람에 넘실거린다. 당연하게 익숙한 줄 알았던 풍경이 생경하게 다가왔고 나는 꾸준히 셔터를 눌렀다.

집을 나선지30분만에 금척리 고분군에 도착했다. 울타리가 쳐져 있어 잠시 당황하기도 했으나 조금 돌아가니 고분군 안으로 쉬이 들어설 수 있었다. 들풀이 무성하지 않아 걷는데 큰 불편은 없었다.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천년을 웅크린 소박한 고분들을 프레임에 채우면서도 저 너머 자비로운 와불의 허리같은 산등성이를 소외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시나브로 해가 꽤 높이 올랐다. 잰 걸음으로 다녀도 늘 촬영 시간은 부족하다.

여기 서 있으니 경주로 통학하며 보았던 금척리 그리고 고분군 풍경은 옛 모습 그대로인데 변한 것은 오직 나 하나 뿐인 것 같다. 짧은 그 하루의 기억으로 금척리에 들어설 때 뭔가 설레이거나 감상적이 되지는 않았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손에 들려진 카메라로 현재를 더욱 치열하게 기록하는 것 뿐이었다. 마치 나 또한 시간을 초월해 필름에 박제될 수 있는 것 마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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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photographed by leica m6 & ilford hp5 pl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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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Drifting, Essay, Gallery, uncategorized태그:, , , , , , , ,

1개의 댓글

  1. 역시 옛날 얘기는 무조건 옳습니다. 풋풋한 추억이 있는 금척리였군요. 자칫 처가가 될 수도 있었 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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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상당히 흥미진진한 이야기였어요.
    외사랑의 결말은 항상 이리도 안타까운지…
    주아비님의 금척리 사진은 또 다른 시선이네요.
    잘 봤습니다.
    옛 기억도 같이 해주셔서 더욱 감사합니다.

    Liked by 1명

  3. 금척은 들을 적 마다~ 엄지 척~하는 이런 느낌 말입니다.

    그래서 주아비님 작품도 엄지 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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