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ogon의 영혼 / Orion-15 28mm f6.0


▶ Orion하면 당신은 무엇이 떠오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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쵸코파이, 포카칩, 고래밥, 오감자 따위가 떠오른다면 당신은 지극히 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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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함 잡는 대잠초계기 P-3C ORION이 생각난다면 당신은 밀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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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온 자리가 떠오른다면 당신은 천체나 신화에 관심이 많은 고상한 사람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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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것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면, 당신은 환자! ㄷ 환자들을 위한 오리온에 대한 글을 써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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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de in U.S.S.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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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츠와 자이스이콘(칼 자이즈)이라는 막강 원투 펀치로 대표되는 독일 업계가 세계 시장을 석권하던 당시 여러 나라의 여러 군소업체들은 그 나름의 방식대로 수많은 카메라와 렌즈를 생산하며 시장에서 입지를 다지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까지도 당시의 제품들이 생명력을 가지고 거래되고 있는 것들은 소수에 불과한데 그 중에서 소련제 카메라와 렌즈들은 상당히 특이한 케이스로 남아 있다.

오늘날도 별반 다르지는 않지만 당시에 제대로 된 카메라와 렌즈를 제조할 수 있는 국가는 많지 않았다. 비록 업계를 선도하는 기술력을 보유하지는 못했지만 제법 괜찮은 성능의 제품을 대량으로, 그리고 저렴하게 찍어낼 수 있었던 것은 소련이 가진 가장 큰 무기였다. 게다가 라이카와 콘탁스를 카피한 제품들을 출시했기에 구하기 어렵고 가격이 비싼 올드 라이카와 콘탁스의 훌륭한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점 또한 오늘날 큰 매력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중에는 독일제 카피가 아닌 독자적인 설계로서 우수한 성능을 자랑하는 녀석들도 있었는데 비오곤과 슈퍼 앵글론에 앞서 등장한 Russar 20mm가 그러하고 오늘 리뷰하려는 Orion-15 28mm 역시 손에 꼽을 수 있는 렌즈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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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rion-15 28mm f6.0 : 소비에트 Topogon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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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에 연합군이 상륙하고 동부전선의 소련군이 독일군을 점차 서쪽으로 밀어내고 있던 1944년. Orion-15라는 새로운 28미리 렌즈의 프로토 타입이 등장했다. 온 국토가 그야말로 초토화된 소련에서 정신없는 전쟁의 와중에도 새로운 민수용 렌즈가 연구 개발되었다는 것도 신기하지만 더 호기심을 자아냈던 것은 이 렌즈의 특이한 설계 방식때문이었다. Orion-15는 Carl Zeiss가 선보였던 4군 4매 좌우대칭의 Topogon 설계를 따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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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on-15 28mm f/6.0의 설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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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즈의 설계는 결국 수차와의 싸움인데 다양한 수차를 억제하기 위해서는 많은 매수의 렌즈를 투입해 보정해야 하지만 코팅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과거에 렌즈 매수의 증가는 결국 투과율 저하로 인한 해상도, 콘트라스트의 저하와 내부 난반사로 이어지는 문제가 있었고 결국 최소한의 렌즈로서 최대한 수차를 억제하는 것이 성패의 관건이 될 수 밖에 없었다. Tessar나 Elmar같은 3군 4매의 단순한 렌즈들이 당시 기준으로 우수한 해상도와 콘트라스트를 장점으로 내세울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Topogon은 정확한 좌우대칭 구조를 통해 광각렌즈에서의 왜곡 수차를 극도로 억제할 수 있었고 4군 4매라는 적은 렌즈 매수 덕분에 해상도와 콘트라스트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다. 다만 렌즈의 높은 곡률로 인해 구슬과도 같은 렌즈알을 정밀하게 가공하는 것이 쉽지 않았고 자칫 주변부의 해상도가 급격히 떨어지고 비네팅이 심하게 발생하기 쉬웠다. 이러한 이유로 단순한 구성에 비해 생산이 쉽지 않았던 것인지 Topogon타입을 개발한 Carl Zeiss조차 Topogon 25mm f4.0를 대량으로 생산해내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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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가의 전설 Carl Zeiss Jena Topogon 25mm f/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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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1944년에 소련에서 이러한 Topogon 설계를 적용한 Orion-15를 개발했다는 점은 새삼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Topogon의 본가 Carl Zeiss와 달리 소련의 광학 기술에는 한계가 느껴지는데 Orion-15가 비록 Topogon 설계를 따랐다고는 하나 렌즈의 단면도를 보면 날렵하고 얇게 만들어낸 오리지날 Topogon과 달리 상당히 두툼하고 곡률도 낮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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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면에서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 주변부의 성능도 본가의 명성에는 도달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다. 화각이 다르긴 하지만 Carl Zeiss의 Topogon은 25mm에 f4.0을 달성한 반면 Orion-15은 28mm에 f6.0에 머물고 있다. 물론 당시 Carl Zeiss의 Tessar 28mm가 f8.0, Leitz의 Hektor 28mm도 f6.3에 불과했으니 Orion-15의 f6.0은 그 자체로는 큰 문제는 아니긴 했다. 하지만 이 6.0이란 개방수치는 소련제 토포곤의 한계로 인한 것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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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전히 열리지 않는 조리개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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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on-15를 살펴보면 최대개방 상태에서도 조리개가 모두 열리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직도 한참이나 더 열릴 것 같은데 f6.0이 최대 개방으로 멈춰지게 만들어져 있다. 이를 궁금하게 여긴 일부 환자분들께서 직접 개조를 해본 결과 f2.8 정도에 해당하는 값까지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하셨다. 하지만 문제는 이렇게 강제로 개방값을 확장했을 경우 사실상 중앙부를 제외하곤 쓸 수 없는 수준의 화질이 나온다는 점이었다. Topogon 구조의 특성상 주변부 화질이 급격히 떨어질 수 있다고 앞서 언급하였는데 Orion-15를 개조해 완전히 개방해보면 그 같은 문제점이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물리적으로 가능한 최대 개방에서의 화질은 형편없는 수준이었기에 ‘의미없는’ 최대개방값은 포기하고 ‘사용가능한 수준’의 최대개방치에 맞춘 것이 f6.0이었던 것이다. f4.0에서도 조리개가 거의 다 열리는 Carl Zeiss의 Topogon과의 기술 격차를 엿보게 해주는 부분이라 하겠다. 어쨌든 이 같은 선택으로 결론적으로 렌즈 설계의 결점이 감춰질 수 있었고 원래 6.0부터라 생각하고 사용하면 전혀 문제는 없는 부분이긴 하다(응?). 이미 충분히 조여진 상태를 최대 개방으로 ‘표기’하다 보니 1스탑만 조여도 최대 해상도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다는 장점도 있고 최대개방시에도 비네팅이나 주변부 화질 저하가 적다. (뭔가 크롭바디에 풀프레임 렌즈를 꽂은 느낌이..)

그러나 Topogon타입에서 이런 꼼수(?)를 쓴 것은 Orion-15 뿐은 아니었다. 50년대에 Topogon타입에 매력을 느낀 니폰고가쿠와 캐논도 이런 렌즈를 출시하게 되는데 이들은 보다 Carl Zeiss Topogon 설계를 적극적으로 벤치마킹하여 화각도 동일한 25mm로 출시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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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폰고가쿠의 W-Nikkor 2.5cm f4.0은 렌즈 단면도에서부터 오리지날 Topogon의 향기가 강하게 난다. 같은 25mm 화각에 최대 개방값도 f4.0으로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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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S.K.님의 W-Nikkor 2.5cm f4.0 L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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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렌즈 역시 최대 개방시에 조리개가 살짝 덜 열린다. 물리적으로는 f3.5 이하의 개방값이 가능할 것으로 보이는데 결국 W-Nikkor도 f4.0에서 멈췄다. 당시 독일 렌즈보다 더 밝게 만드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던 일본 기술진들이 토포곤을 뛰어넘자고 덤볐다가 한계에 부딪히자 역시 f4.0으로 리밋을 걸어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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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on에서도 Topogon 타입 25mm f3.5를 출시했다. 니폰고가쿠와 달리 칼자이즈보다 조금 더 밝은 개방값으로 만들어내는데 성공했지만 역시 조리개날이 완전히 열리지는 않는다. 사실 이 렌즈는 Topogon타입의 변형인데 완벽한 좌우대칭 4군 4매가 아니라 후면의 2매가 조금 더 크고 아주 특이하게도 맨 뒤에 평면유리가 자리하고 있다. 저 평면유리의 역할이 무척 궁금했는데 Goliathus님의 실험에 따르면 저 렌즈를 빼고 촬영하면 초점이 제대로 맞지 않는다고.. 어쨌든 이 렌즈는 순수한 Topogon 타입으로 보긴 어렵겠지만 그리 많지 않은 형식이니 끼워주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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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날의 위엄. Carl Zeiss Jena Topogon 25mm f4.0의 경우 짝퉁(?)들과 달리 최대개방에서도 조리개가 거의 대부분 열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사진 : quanj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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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rion-15 의 두가지 타입, Contax Mount & M39 Mou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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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on-15 브로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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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on-15는 프로토타입이 등장할 1944년 당시 콘탁스용 베이요닛 마운트로 설계되었다. 소련이 콘탁스 마운트 렌즈들을 본격 양산하게 되는 시기는 1948~9년경으로, 잘 알려져 있다시피 예나와 드레스덴의 칼자이즈와 자이스이콘 콘탁스 생산 라인을 뜯어간 후 부터인데, 따라서 Orion-15를 개발할 당시 소련제 카메라 중 콘탁스 마운트를 적용한 제품이 없었음에도 왜 굳이 콘탁스용 마운트로 설계했던 것인지 다소 의아하다. 어쨌든 그런 연유로 소련에서 콘탁스 마운트로 제작한 첫번째 렌즈가 Orion-15일 가능성이 높다. 아쉽게도 현재 콘탁스 마운트 버전 Orion-15 매물은 찾아보기가 매우 어려운데, 오늘날 콘탁스 유저가 극소수라는 점을 감안하면 아쉬운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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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on-15 프로토 타입(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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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에는 드디어 M39(LTM) 마운트 버전이 출시된다. 이로써 자국의 조르키나 페드에서도 Orion-15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서방세계로 수출도 이루어졌다. 물론 당시엔 Summaron 28mm f5.6이 등장하던 시기라 듣보잡 못난이 Orion-15 따위가 고급진 라이카 유저들의 눈에 찰리는 없었겠지만 Orion-15의 출현으로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비싸기만한 주마론의 가격 대비 20% 미만의 비용을 지불하고도 바르낙에서 28미리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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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on-15 28mm f6.0(L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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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rl Zeiss Jena Tessar 2.8cm와의 관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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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on-15의 두가지 버전(Contax용과 LTM용)의 디자인을 살펴보면 꽤 재미있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두가지 모두 Carl Zeiss Jena Tessar 2.8cm의 외관과 꼭 닮았다는 점이다. Carl Zeiss Jena Tessar 2.8cm는 세계 최초의 28미리 렌즈로서의 영혼과 상징성을 갖는 렌즈인데 Contax 마운트로만 제작이 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최근 LTM 버전도 생산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2차대전 중 칼 자이즈는 콘탁스용 교환렌즈들을 LTM 버전으로 생산하기도 했는데 그 중 Tessar 2.8cm는 관련 자료나 사진을 거의 보질 못해서 존재를 몰랐다. 이베이에서 출현한 매물과 가뭄에 콩 나듯 검색에 걸리는 몇몇 사진들을 검토해본 결과 짝퉁이나 개조 버전은 아닌거 같다는 판단을 내렸다. 각각의 버전 사진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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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l Zeiss Tessar 2.8cm f8.0 (for Conta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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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l Zeiss Tessar 2.8cm f8.0 (L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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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위아래로 왔다갔다 비교해보면 Orion과 Tessar는 정말 닮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련에서 Fed 28mm를 개발할 때는 Leitz Hektor 28mm를 카피했고 Orion-15를 개발할 때는 Carl Zeiss Tessar 2.8cm를 카피했던게 아닐까. 외관은 거의 그대로 베낀반면 렌즈 구성은 3군 4매의 테사 형식에서 4군 4매 토포곤 형식으로 변경됐다. 아마 좀 더 밝고 왜곡이 적은 설계를 적용하려 했던 것이리라. 어쨌든 LTM 버전 Tessar 2.8cm의 존재를 확인하고 났을 때 비로소 Orion-15의 헤어진 엄마를 찾은 듯한 느낌이었다. ‘네가 그냥 못생긴게 아니었고 근본있는 못생김이었구나!’ (결국 소련 잘못이 아니라 독일애들이 잘못한거였.. 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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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opogon의 영혼을 이어간 Orion-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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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대 이후로는 렌즈 제작 기술이 더욱 발달하면서 수차를 보정하기 위한 보다 많은 매수의 유리가 들어가고도 코팅 기술의 발전이 이루어지며 더이상 제조가 까다롭고 밝은 개방값을 갖는데 한계가 있는 Topogon 타입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렇게 Topogon의 명맥은 끊어지게 되었지만 광학적 성능의 발전과는 별개로 구슬같이 아름다운 Topogon 타입에 대한 매니아들의 호기심과 열정은 유별나, 몇 안되는 종류의 Topogon 타입 렌즈들은 여전히 비싼 가격을 자랑하고 있고 물건도 귀해 어지간히 미치지 않고서는 손에 넣기가 쉽지 않다.

그런 반면 1944년 프로토타입이 처음 등장한 이후 1978년까지 지속적으로 생산된 Orion-15는 화석이 될뻔한 Topogon의 생명력을 유지해준 최후의 계승자가 되었다. 생산 기간이 길었던 만큼 여전히 많은 개체가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으며 LTM용 28미리에 절대 강자가 없는 현실에서 200불 내외에 구입할 수 있는 Orion-15는 Topogon 타입을 즐겨보고 싶은 애호가들에게 상당히 고마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물론 Orion-15가 이렇게 오랜 기간 생산될 수 있었던 것은 꼭 성능의 우수함이나 소비자들의 선호에 기인한다고 보기는 어렵고 시장에서의 경쟁이 사라진 공산주의 체제의 특성에 더 큰 무게를 두어야 할 것이다. 긴 생산 기간에도 불구하고 성능상의 개선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주피터 계열 렌즈들은 후기형으로 갈수록 그나마 코팅이라도 두터워지는데 반해 Orion-15는 초기형과 별반 다르지 않은 블루 계열의 싱글 코팅이 계속해서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불편한 조리개 조절 방식과 어두운 개방값도 그대로였고 못생긴 외형도 변하지 않았다. (물론 이 렌즈가 주마론처럼 예뻤다면 지금 중고가격이 저렇게 싸진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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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MZ에서 ZOMZ로 제조사가 바뀌면서 렌즈 형태가 다소 바뀌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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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발전이 더뎠던 탓에 후기형의 메리트는 크지 않아 대부분의 소련제 렌즈들이 그러하듯 Orion-15 역시 50년대~60년대 초반까지의 제품들이 인기가 높다. 비교적 품질 관리가 우수했으리란 믿음 때문인데 개인적으로는 확인하기 어려운 그런 이유보다는 KMZ 생산 60년대 초반 제품까지만 붉은 색 ‘n’코팅 마킹이 있어서 보기에 더 예쁘기 때문이다. (칼 자이즈 렌즈의 T코팅 표기와 같은 느낌) 이왕이면 영혼이 느껴지는 50~60년대초반 개체를 구하고 싶었으나 Jupiter-12와 달리 Orion-15는 이 시기의 매물이 많지 않고 있다해도 상태가 좋은 것이 드문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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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이면 영혼있는 ‘n’마킹이 있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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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혼가득 볼매 Orion-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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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on-15는 사실 보고 만지는 재미가 쏠쏠한 렌즈는 아니다. 개체수도 많은 편이라 소장가치가 높은 것도 아니고 알루미늄 경통은 표면이 부식되거나 때를 타 지저분한 물건이 많고 디자인도 단순 무식하기 짝이 없다. 냉장고를 뜯어서 만들었다는 우스갯 소리가 괜한 것이 아닐 정도로 못생긴 외모에 경악하곤 한다. 게다가 소련제 저질 윤활유로 인해 초점링의 조작감도 고급스럽지 못하다. 물론 윤활유야 수리실에 맡겨서 금방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긴 하지만 10~20만원 정도 주고 산 싸구려 렌즈에 돈을 들일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쓰다가 싫증나면 팔고 산 사람도 ‘소련제가 이렇지 뭐.’ 하면서 계속 그 상태로 돌고 도는 경우가 많으니 안타깝다.

그럼에도 이 렌즈에는 볼수록 묘한 매력이 있다. 들고 나갔을 때 폼 나지도 않고 귀한 걸 갖고 있다며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살 일도 없는 렌즈, 아니, 대부분의 이들이 ‘그런 렌즈도 있냐? 잘 나오냐?’ 정도의 약간의 호기심만 표현할 뿐 관심조차 사지 못하는 렌즈인데도 말이다.

못생긴 외모와 저렴한 가격은 이 렌즈를 객관적으로 논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한다. 생긴게 못생겼으니 흥미를 갖지 않고 가격을 듣고는 ‘뭐 싸네. 사진은 그럭저럭 나오나보네.’ 정도의 반응을 넘어서는 사람도 많지 않다. 비록 못생겼어도 만약 이 렌즈가 오리지날 토포곤 처럼 비쌌다면 반응은 분명 달라질 것이다.

비싼 렌즈를 좋다고 하기는 쉽지만 싼 렌즈를 좋다고 얘기하는 것은 꽤나 힘들구나 라는 걸 이번 리뷰를 쓰며 절실히 느끼고 있다. 문과 출신이라 아는 것도 없고 객관적 테스트를 나열하며 리뷰를 쓰는 체질도 아니라 글로만 떼워 왔었는데 나 부터도 이번 리뷰는 그런 것들을 들먹이며 써야하지 않나 하는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이거 정말 좋아요!’ ‘어 그래 안좋은 렌즈 있나.’ 이런 무미건조한 반응을 방지하려면 ‘오 그래요?’ 하는 리액션이 나올만한 뭔가가 있어야 하는데 데이터가 나오는게 별로 없다. 그래서 결국 이번 리뷰도 이렇게 글로 떼우다가 끝내긴 하는데.

사실 사진을(카메라를?) 취미로 하면서 가성비만 찾는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오리온이 싸고 좋다는 것에만 초점을 맞출 생각은 없다. 싸고 좋은 렌즈는 얼마든지 많으며 싸다고 해서 수십배에 달하는 가격의 라이카 렌즈와 비교해 그 품질이 크게 떨어지는 것도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싼 맛에 쉽게 살 수 있는 렌즈에 대한 호기심과 만족도는 금세 시들게 마련이다. 결국 소유에 따른 만족감은 렌즈가 가지고 있는 스토리와 역사성, 그리고 적정수준의 희귀성, 즉 내가 늘 얘기하는 영혼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다. (쿨럭, 렌즈에 무슨 영혼..) Topogon 형식이라는 이제는 다시 나올 수 없는 당대 최선의 설계로 만들어진 구슬과도 같은 앙증맞은 작은 렌즈알과 거기서 뽑아주는 왜곡 없는 시원한 이미지와 높은 해상도와 콘트라스트가 만들어주는 칼칼한 느낌. 이만하면 내 기준엔 충분히 소유할 가치가 있다.

못생겼네 어쩌네 이 렌즈를 깔 필요도 없다. 기껏해야 민트급 Irooa 후드 하나 가격밖에 안하는 렌즈에 미학적 완벽을 바라는 것부터 과한 욕심이다. Topogon의 영혼을 지닌 Orion-15, 근래 써본 렌즈 중 가장 인상적인 녀석이었다. 싸기 때문이 아니라 정말 매력이 넘치는 렌즈다. (믿어주세요) 28미리 화각, 그리고 Topogon에 관심이 있는 모든 이들에게 적극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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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온 자리의 사진을 다시 보니 Orion-15의 이름이 괜히 오리온이 아니란 걸 알겠다. Topogon의 특징이 좌우대칭이란 점에서 착안한 이름임에 틀림 없으리라. 렌즈 구조의 특징을 별자리에 빗대어 이름을 정하다니, 이 얼마나 낭만적인가! (Summaron? 무슨 뜻임? 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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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디와의 장착 샷 (못생김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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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바디와 매칭하면 미친듯이 못생기진 않았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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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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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온 만쉐이~!

 

Special Thanks to LEE T.Y.

 

 

※ 참고로 뒤적였던 자료들

https://en.wikipedia.org/wiki/Topogon

http://www.sovietcams.com/index.php?398258553

http://www.sovietcams.com/index.php?1740225226

http://www.marcocavina.com/articoli_fotografici/Soviet_and_wide_lenses_on_Leica_M/00_p.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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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의 댓글

  1. 막상 바디와…미친듯이 못생기지 …

    변방과 경계에서 소외된 것들에 관한 관심이 렌즈에까지 이른 듯 해서 … 찍어내는 이미지들과 딱 어울리는 연장이기도 하고 말이죠.

    덕분에 듣보잡들이 변방에서 봉기한 듯 시원함이랄까요.

    엄청난 리뷰와 사진 고맙습니다.

    Liked by 1명

  2. 재미난 다큐한편 본 느낌입니다.
    오리온하면 과자가 생각나는 1인이지만 부담없이 28미리 한번 써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잘 보고 갑니다. ^^

    Liked by 1명

  3. Metallica의 Orion을 틀어놓고 보고 있습니다 +_+

    Liked by 2 people

  4. 러샤 렌즈들은 정말 모두 다 매력적임. 못생겼지만 막상 바디에 매칭시키면 봐줄만함. 게다가 가격까지 착하니. *^^*

    Liked by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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