넬라 판타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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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트 페테르부르크(Санкт-Петербург )를 떠나오기 전,  러시아 북서부의 카렐리야공화국(Респу́блика Каре́лия)을 방문했습니다. 카렐리야공화국은 백해에 인접한 아름다운 곳으로, 유럽에서 3번째로 크다는 오네가호( Онежское озеро)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호수에는 1,650개의 섬들이 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곳이 키지(Кижский Погост)입니다.

키지는 섬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자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라자로의 부활교회와 예수변용교회를 비롯, 89개의 중세 목조 건물들이 본래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또한, 500여 점의 중세 성상화를 볼 수 있고, 섬 전체를 뒤덮은 초원과 꽃밭을 걸을 수 있는 곳입니다.

라도쥐스키역(Ладожский вокзал)에서 밤 기차를 타고 카렐리야공화국으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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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타보는 1등석 침대차였습니다. 독립된 객실에 양쪽으로 침대 겸 좌석이 놓여있고, TV와 룸서비스, 전용 화장실과 승무원도 갖추고 있습니다. 열차 한 량에 9개의 객실이 좁은 복도로 이어져있구요.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이 생각났습니다. 오리엔트 특급이었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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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되어 종착지 페트로자보스크역에 도착했습니다. 문 앞에 선 분이 1등석 승무원인데, 실수로 호출버튼을 눌러 헛걸음하게 한 뒤로는 아무리 불러도 오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모닝 커피를 마실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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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러시아 열차라면 왠지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떠올랐고 그 이미지는 닥터 지바고에 나올 것 같은 증기기관차였습니다. 객실안에 석탄 난로가 있고, 눈 덮인 벌판을 달리는 그런 이미지 말입니다.

실제 러시아 열차는, 우리 열차들보다 오히려 더 깨끗하고 최신식이었습니다. (얼핏 보니 스웨덴제인 것 같았습니다.)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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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북에 적힌대로 트랄레이부스를 타고 키지섬으로 향했습니다. 혹시나 싶어 구글맵을 켜고 가는데, 아무리봐도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 같았습니다. 아뿔싸, 당황해서 차장아주머니(오른쪽의 하늘색 옷 입은 분입니다)께 손짓발짓 여쭤보니 어디 쯤에 내려서 어느 방향으로 가라고 손짓발짓해주셨습니다. 걱정하지 말라는 표정으로 미소지으면서요. 걱정이 눈녹듯이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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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불이 되면 걷는 애니메이션이 나오는 신호등을 신기해하며 15분 쯤 걷다 보니 멀리 오네가호수가 나타났습니다. 다행히 크게 헤매지 않고 찾아온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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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렐리야공화국에서 처음으로 영어가 통한 곳이었습니다. 매표소인 것 같기는 한데 안내판이고 부스고 어디에도 키릴어만 씌어 있어서 당황하고 있는데, 표파는 아가씨가 영어로 말을 건네왔습니다. 아가씨가 무척 예뻐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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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속선을 가득 채운 러시아 고등학생들이 떠드는 소리를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알아들으며) 듣다보니 멀리 키지섬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변용교회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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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매표소에서 다시 입장권과 지도를 사는데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우산을 빌릴까, 잠시 고민하다가 그대로 섬으로 들어갔습니다. 어쩐지 비를 맞고 싶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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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4년 건립된 예수변용교회는 높이 43m로, 단 하나의 못도 쓰지 않은 목조교회입니다. 키지섬의 장인들은 도끼만으로  40년에 걸쳐 교회를 지었답니다. 가이드북의 설명대로, 서로 다른 크기의 쿠폴(양파형 지붕) 22개를 올려다보니 마치 하늘로 올라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교회에 방문했을 때 하필 보수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공사를 시작한지 3년이나 지났음에도 별로 진척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궁금해져서 뒤져보니, 처음 지은 방식 그대로 보수공사를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도끼만으로 말입니다. 40년이 걸려 지은 중세의 건물을, 그때와 같은 방식으로 느릿느릿 보수하고 있다는 설명에 말문이 막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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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쪽에는 18세기의 이콘화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초를 하나 켜고 돌아서니 입구의 수도사들이 축복을 건네왔습니다. 전통 복장의 수도사들의 라틴어를 들으니, 마치 중세로부터 인사를 받은 느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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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근의 농가에 비치된 방명록에 괴발개발 인사를 남겼습니다. 이 방명록이 다시 이곳으로 데려다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비오는 키지를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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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장 미카엘 예배당에서 음악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2층 종루에서 여러 개의 종으로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비내리는 초원에 울려퍼지는 높고 낮은 종소리는 영적인 체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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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최초의 교회 – 라자로의 부활교회에 머물렀습니다. 14세기 후반에 건립된 교회는, 예의 쿠폴이 십자가를 받치는 형태였습니다.

비가 조금씩 굵어졌지만, 발길을 재촉해서 섬 반대편으로 향했습니다. 체류가 허락되는 건 고작 4시간 – 길을 서둘러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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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섬 맞은편까지는 가지 못했습니다. 70여개의 중세 건물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중세 방식 그대로 살고 있는 사람들의 풍경을 멀리서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방향을 바꿔 선착장으로 향하다보니, 언덕위의 마을 묘지를 지나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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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굵은 철사, 철판으로 만든 십자가와 사진들, 낮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봉분, 이 섬의 선조들이 중세부터의 방식으로 영원한 안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길을 재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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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운 마음으로 키지를 떠나왔습니다. 날이 좋았다면 천국의 풍경을 만날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대로도 충분히 좋았습니다. 빗속의 키지도 충분히 아름다웠고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 같은 평화로움으로 가득차있었습니다.

배에서 내려 다시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걸어서 페트로자보스크역에 도착했습니다. (두 대의 버스를 탔지만 역으로 가는 버스가 아니었습니다. 제 엉터리 러시아어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다는 표정만이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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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상트행 기차에 올랐습니다. 돌아가는 길은 일반 열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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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창 밖으로 흩뿌리던 빗줄기는 상트에 가까워지면서 잦아들었습니다. 말쑥한 하늘로 해가 지는 풍경을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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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트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을 때, 도시는 깊은 잠에 빠져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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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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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의 댓글

  1. 키지의 내음이 궁금해지는 글이네요.
    저도 언젠가는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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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제가 제일 해보고 싶은 작업중에 하나가 바로 또치로만 집짓기(응?) 이지 말입니다.
    그런의미에서 목조 테트리스 궁전~ 아니 18세기에 지은 예수변용교회는~ 마스터 피스 그 자체입니다.

    그런의미에서 또치로만 중세 팀버후레임을 완성하는 유툽 한번 걸어드려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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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사막에서 갑자기 희망과 동경의 땅으로…ㄷ
    딱 앙글론 각인데 말이죠. 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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