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사진. – 내 사진의 정체성에 관하여.


1.

2006년 떠났던 유라시아 자전거 여행길.

극기와 자기 도전이라는 목적도 있었지만 내 눈으로 바라 본 세상을 내 나름대로 남기고 기록하고 싶다는 마음도 컸다. 그래서 당시 거금을 주고, 그 이름도 예쁜, 펜탁스의 *ist DL2를 샀다. 기술적으로도, 이론적으로도 사진에 대한 깊이가 훨씬 얕았던 철모르쟁이시절이었다.

다양한 나라를 육로를 통해 거쳐 가는 여행길이다 보니 이국적이고 멋진 풍광을 마주할 수 있는 기회는 적지 않았다. 그렇게 바라 본 풍경은 무엇보다도 내 가슴속에 담아 두는 것이 목표였지만 멋진 사진으로 남기겠다는 욕심도 있었다.

카라코람 하이웨이에서 마주했던 그림 같은 하늘과 빙하가 녹아내린 물이 흘러내려 깎아 낸 물줄기, 그리고 문득 프레임에 들어온 낙타가 빚어낸 절경. 모스크를 배경으로 지는 석양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이란 Yazd에서의 풍경.

IMGP0902

Karakoram Highway, China. / 2006

IMGP1374

Yazd, Iran. / 2006

그렇게 길 위에서 담아낸 풍경들은 충분히 아름다웠고 내심 내가 찍은 사진들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당시 친구 한 명이 했던 얘기는 꽤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네가 찍은 사진들은 ‘달력 사진’을 보는 것 같아.”

심하게 말하면 당시에는 내가 모욕을 받았다고 느꼈을 정도였다.

… 하지만 이제야 되돌아보면 그때 내 생각이 얼마나 부족했던 것인가 하는 마음에 오히려 부끄러운 감정이 든다.

사실 ‘달력 사진’이란 표현이 지칭하는 멋진 풍경 사진이 저 스스로 나쁜 것이 될 리도 없고, 될 수도 없다. 한 장의 사진을 결정하는 것은 그 한 번의 셔터를 누르기 위해 무수히 사유하고 고민했을 사진가의 마음이며, 그 번뇌의 결과가 그 사진의 아우라로 남아 보는 이에게 가 닿는 것이다.

2006년의 내 사진들에는 바로 그것, 사유와 고민이 없었다. 그저 남들이 쉽게 보기 힘든 멋진 풍경 좀 담았다고 대단한 사진이라도 찍은 것 마냥 기분이 우쭐했을 뿐, 내가 저 한 장의 사진에 무엇을 담고, 보여 주며, 전달하려 했는지에 대한 고민은 빠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친구의 한마디 말에 더 발끈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내 사진이 스스로도 부끄러웠던 것이다, 아마도.

2.

얼마 전 몇 년 동안 찍었던 사진들 중 500장을 선택한 후 인화물로 차근차근 리뷰하는 기회를 가진 후, 어느 정도 내 사진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잡게 되었다.

명확히 설명하기는 쉽지 않지만, 크게 보면 내 사진의 지향점은 ‘일상의 기록’이라 말할 수 있다. ‘일상(日常)’이란 표현 그대로 나를 둘러싼 하루하루에 대한 소소한 기술이다. 그때가 언제가 되었건, 그곳이 어디가 되었건 내가 머물렀던 시공간의 흔적들에 다름없다.

… 렌즈만 들이대면 사진이 나온다는, 거리 사진의 천국, 뉴욕 생활을 앞두고 어떤 주제를 가지고 사진을 찍어야 할지 고민이 많다. 단순한 거리 사진이야 찍을 수 있겠지만 고민 없이 담아낸 사진이 제대로 나올 리는 없을 테니까.

몇 번의 짧은 방문 중에 뉴욕이라는 도시가 내게 다가왔던 인상을 구체화하는 작업을 개략적으로 구상 중인데 아직 또렷한 이미지를 그리지는 못 했다. 다만 처음에는 도시의 외형이 주었던 느낌에 치중하였다면, 지금은 내 사진의 장기적인 지향점과 이번 작업을 어떻게 맞춰 나가야 할지에 대해 조금 더 고민 중이다. 예를 들면 ‘거리 사진’이되 ‘내’가 보이는 거리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뭐든 그렇겠지만, 머리로만 열심히 굴려봐야 답은 나오지 않을 테고, 결국은 맞부딪쳐 봐야 하겠지. 이제 그곳과 조우할 날도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그전까지는 아쉽지만 머리로라도 조금 더 생각을 굴려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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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의 댓글

  1. 20년 가까이 달력사진만 찍는 저도 있습니다. ㅠㅠ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끝나지가 않는 것 같네요.

    Liked by 1명

  2. 뉴욕이라는 새로운 환경 적응을 앞두고 이런저런 걱정이 많으시겠지만 새로운 환경은 분명 사진생활에도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다줄 것이라 믿습니다. 물론 긍정적으로 말이죠.

    Liked by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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