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구의 전설


“여보, 돗토리 어때?”

“잉? 돗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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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방비로 있던 내게 돗토리는 이렇게 불쑥 치고 들어왔다.

시작은 ‘대구-오사카’간 특가항공권이었다. 성인 1인당 68,000원이라는 사지 않을 수 없는 가격이라 아내는 일단 표부터 끊어놓았던 것. 막상 출발일이 한달 앞으로 다가오자 “오사카 가서 뭐하지?”라는 현실적인 고민이 시작되었는데, 8월의 오사카는 한마디로 ‘으악’이라는 주변의 무용담에 덜컥 겁이 나버렸다. 게다가 주변도시인 교토를 비롯 고베, 나라까지 최소 한번 이상 들렀던 곳이라 흥미가 1도 일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아내가 돗토리는 어떠냐며 물어왔던 것.

나와 마찬가지로 아내 역시 오사카를 제외한 다른 여행지를 검색하던 중 아들내미가 좋아하는 ‘명탐정 코난’의 작가인 아오야마 고쇼(青山剛昌)의 고향이 돗토리며, 이곳 돗토리현에 코난박물관와 함께 매년 코난 미스터리 투어가 열린다는 걸 알았다. 좀더 파본 결과 올해는 아쉽게도 코난 미스터리투어가 돗토리현이 아닌 야마구치현에서 개최된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와 동해를 마주하고 일본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낮은 한적한 이 곳 돗토리현의 매력에 이미 빠져버린 후였다.

세계지명사전에 따르면 돗토리(鳥取_조취)에는 예로부터 습지에 물새가 많이 살았는데 이 새를 잡아 정부에 진상하는 주민을 돗토리베(鳥取部)라고 한 데서 유래되었다 한다. 하지만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돗토리=사구”라 할만큼 모래가 쌓여 만들어진 언덕인 사구(砂丘)가 유명하댄다. 오죽하면 이 동네에서 가장 유명한 커피체인 이름까지 ‘すなば_스나바(모래밭, 모래벌판)’겠는가?

떠도는 정보로는 돗토리 사구가 아시아에서 제일 유명하다느니 혹은 일본 3대 사구라느니 하며 높이 평가하고 있지만, 사실 이런 평가는 대체 누가 하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여행지에 대한 기대는 직접 보기전까지 최대한 담백하게 가져가는게 지혜임을 나름의 경험으로 잘 알기에 묻지마 랭킹 따위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고 그저 동서 16km 일본 최대 규모의 해안사구라는 물리적 크기 그 자체에 흥미가 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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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앞 터미널에서 사구로 출발하는 7시 첫 차를 타기 전 주변을 잠시 걸었다. 생판 낯선도시건만 한적한 거리와 오밀조밀 낮은 건물에 매달린 번잡하지 않은 간판들에 마음이 편하다. 내가 나고 자랐던 소도시 풍경 딱 그만큼이라 좋다. 삐죽이 솟은 못생긴 빌딩사이 실핏줄마냥 얽혀버린 골목사이로 당장이라도 동맥경화가 걸릴 듯이 사람들로 미어터지는 오사카 같은 거대도시는 당췌 정이 붙질 않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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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0분이다. 바로 저기 4번 플랫폼으로 사구행 첫 버스가 들어올 것이다.

과연 여행으로부터 느끼는 즐거움의 비중을 시기별로 굳이 나눈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자료 조사하며 여행지를 고민하는 여행 전 준비단계가 즐거움의 50%정도 될 것 같고, 현지에서 부닥치는 고생스러움의 마이너스 작용에 의한 여행 중 체감 즐거움은 20% 정도로 낮으며, 좋은 추억들만 잘 추스리고 좋지 않았던 기억마저 잘 포장해서 참하게 색인해주는 영특한 우리 뇌 덕분에 여행 후 만족도는 30% 정도의 비중을 가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상 낯선 사구행 버스를 기다리는 지금, 당시 나는 여행 중의 기대감을 너무 과소평가해버린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는 예정된 플랫폼으로 천천히 들어왔고 관광객답지 않은 의연함으로 뒷문에 올랐다. 버스는 정각에 출발하여 한적한 돗토리 시내를 통과한다. 평일이지만 출근하기엔 이른 시간인지 버스에 오르는 이는 많지 않다. 이십분 남짓 달린 버스는 사구입구 정류장에 도착했고, 전날 구입해두었던 3일짜리 무제한 버스패스를 마패처럼 당당하게 기사양반에게 보여주며 경쾌한 걸음으로 하차했다.

낯선 장소의 냄새를 각인시키려 깊은 들숨을 쉬지만 한 여름날의 니맛도 내맛도 아닌 미적지근한 아침공기는 상쾌함과는 분명 거리감이 있다. 미련없이 나는 잰 걸음으로 구글 스트리트뷰에서 학습해두었던 최단코스를 따라 사구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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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찜해두었던 그 구멍(?)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순식간에 광활한 모래세상이 펼쳐진다. 중거리에서 원거리로 시선을 옮아감에 따라 구릉진 모래언덕 너머로 그 이름 반가운 동해가 무게중심을 잡아준다. 이곳은 오직 모래와 바다 그리고 잔뜩 찌푸린 하늘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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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벅서벅 발이 빠지는 모래밭을 걷는 것에 조금 익숙해질 무렵, 눈 앞에는 거대한 모래언덕이 동해와 나 사이를 가로막는다. 우마노세(말의 등)다. 높이 50미터 가량의 동서로 길죽하게 뻗은 모래언덕이다. 이 거대한 덩치를 눈앞에 마주한 닝겐은 너나할 것 없이 기필코 오르고야 말겠다는 집념이 일어버리는 듯 하다. 그리고 결국 운명처럼 하나같이 말 등에 붙어 낑낑대는 개미가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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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환해지자 관광객들이 본격적으로 몰려든다. 여행 전 머리 속에 그려두었던 사구적 풍경(?)이 갖추어지기 시작했으므로 이미 지쳐버린 몸뚱아리를 독려했다. 사실 그늘 하나 없는 모래사장에서 몇 시간째 사진 찍는 일이 그리 녹록지 않다. 새벽 호텔을 나서며 챙겨 온 생수 한 병이 달다. 하지만, 작정하고 나가도 하루 한롤 찍기 어려운 나임에도 어느새 두 롤째다. 아마 다시는 못볼 풍경이라는 이유가 먼저일테고 필름 시작한지 이제 1년을 넘기면서 셔터문턱 또한 많이 낮아졌음이 두번째일거다. 하긴 올해들어 8개월 동안 벌써 50롤 이상을 찍었으니 한주 한롤이던 작년에 비해 필름 소모량이 증가한 것이다. 익숙함이란 그런건가 보다. 작년 6월 첫 롤 로딩 때 잔뜩 힘이 들어가 굳었던 어깨는 세월이 자남에 따라 부드러워지고 P사장님의 오리지날 레더케이스로 더할나위 없이 완벽한 그립감을 자랑하는 바디는 손 안에서 춤추듯 주어진 임무를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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돗토리와 동해를 공유하고 있는 탓일까? 어머니의 넉넉한 실루엣이 연상되는 사구는 우리네 제주오름과 오버랩되었다. 그리고 그 연결고리는 자연스레 김영갑선생님으로 이어졌다. 촉촉한 초록의 오름과 달리 건조하기 짝이 없는 모래세상인 이 곳에서 우에다 쇼지(植田正治)는 과연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것일까? 다음 날 예정된 우에다쇼지 사진미술관이 자못 궁금해졌다. 국적이 다른 전설(傳說)이건만, 전설은 전설끼리 손을 맞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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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uncategorized, Essay, Drifting태그:, , , , , , , ,

1개의 댓글

  1. 사막에서 보던 사구와는 또 다르군요. 바다와 어우러지는 풍경이 근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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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전 저기 가서 한국 쓰레기를 몇 봤어요. 동해를 건너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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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예전에 다니던 검도장이 돗토리 켄도 클럽하고 자매결연은 맺었다나 어쨌다나~ 가끔 교류도 하고 그랬던 기억이 났습니다.

    정작 그땐 제가 앵벌이 하느라 정신 없어서~
    대사성질환 예방차원에서~ 어렵게 운동하는 시간 마련해가~ 교류 활동에 참여할 생각은 하지도 몬 하고 다녔는데~

    돗토리에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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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장관입니다. 사막, 모래해변, 지루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에 대한 반전이군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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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일단 새벽이 제겐 어려울 듯 합니다.^^
    이어지는 이야기 기대합니다.

    사진 멋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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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역시나.
    역시나.
    한 참을 입벌리고 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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