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여느 벌초


“8월에 벌초하는 사람은 자식으로 안 친다.”

이 속담을 아버지를 통해 이번에 알게 되었습니다. 음력 8월 15일 추석 성묘 전에 벌초를 하는 우리나라 미풍양속에 관한 속담이라고 합니다. 이 날은 9월 3일 일요일. 음력 7월 14일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8월 전 벌초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근 5년 만에 오는 벌초인 듯 한데, 아버지와 삼촌들은 매년 저 속담을 지키러 이맘때 오셨다고 하네요.

충북 음성에 모셔진 저의 할아버지 할머니의 묘에 왔습니다. 전남 벌교가 본거지이지만, 전국 각지에 흩어진 9형제의 방문이 용이하도록 충북 음성에 장지를 선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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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만에 온 길인데도,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벌초가위로 길을 내면서 올라가야했습니다. 큰아버지가 맨 앞에서 길을 내고 전 얌체같이 뒤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상황을 인지하고, 죄송한 마음에 얼른 앞장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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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에 오르는 길은, 가을 문턱이지만 한여름 더위를 연상케하는 뙤약볕 아래의 온통 초록색 풀들이었는데,  그 속에 눈에 띄는 짙은 보라색 열매를 품은 식물들을 여러번 발견합니다. 예쁜 색깔대비 피사체에 흑백 필름 카메라를 들이대는 저를 보고, 함께 오신 숙모가 이르기를 “자리공”이라는 외래종 식물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찾아보니, 잡초이자 독초이며, 뿌리는 인삼 도라지와 비슷하여 종종 중독사고가 일어난다고 하는군요. 기후온난화로 인해 자생 식물 터전에 아열대성 외래종들이 많이 들어옵니다. 자리공은 토양 산성화의 주범이라는 잘못된 비난에 시달리며 한 때 박멸 대상이기도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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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산소에 도착했습니다. 묘지의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가려버린 무성한 잡초들이 지저분하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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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1차 벌초를 마치고, 차례상을 준비하면서 한 컷. 왼쪽에 계신 분이 큰아버지, 오른쪽에 계신 분이 저의 아버지입니다. 오랜 만에 뵈니 많이 늙으셨습니다. 가운데 뒤에 서계신 분이 넷째 삼촌, 왼쪽 양산의 부인은 여섯째 숙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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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가 제거되고나니 제법 깔끔해졌습니다. 할아버지가 간만에 시원하게 이발하셨다고 큰아버지가 좋아하시는군요. 중간중간 사진 찍으면서 그래도 제일 젊은 제가 가장 많은 작업을 했습니다. 일주일이 지난 지금도 양쪽 팔 움직임이 정상이 아닐 정도입니다.

게다가 콘탁스의 뷰파인더를 보는 일, 그것도 초보자로서 두개를 왔다갔다 보며 땀에 범벅이 된 얼굴을 갖다대는게 여간 곤욕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포스팅하는 즐거움이 없었다면, 이번 출사는 그저 “다시는 벌초 때 카메라 들고 오지 말것” 이라는 교훈만 남겼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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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할아버지 할머니는 9형제를 낳으셨습니다. 고모도 두 분이 계시구요. 살아 생전에도 금실이 좋으셨고, 지금도 이렇게 한 자리에 함께 계십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에 관한 저에게 말 못할 비밀이 있는 듯한데, 아직도 아버지와 큰아버지는 그 비스무레한 얘기만 나오면, 살짝 회피하는 기색을 보입니다. 저에게 할아버지는 엄하고, 바둑 잘 두시고, 검소하시며, 20여명의 손주를 품에 안으시고 이뻐하시는 모습으로만 기억되고 있습니다.

할아버지와의 추억담으로 차례상이 조용할 순간이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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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이 다 소진된 후에는 리코 GR 디지털로 몇장 더 찍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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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마지막 필름 사진과 같은 자리에서 찍은 사진인데, 21mm 와 28mm 화각의 차이만큼 딱 느껴집니다.

 

 

차례 지낸 후, 2차 벌초를 마치고나니, 묘 주변이 더욱 깔끔해졌습니다.

가을 문턱에서 이뤄진, 가족들과의 산행, 아버지의 아버지에 관한 추억담, 그리고 뙤약볕 아래 벌초라는 중노동까지… 다분이 관행적인 일상이지만, 오래오래 남기고 싶은 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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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 쉽게 마무리가 되지 않는 일정이었던 것이…

모든 일정을 정리하고 서울로 바삐 올라가는 차에서 번개처럼 내리치는 공포감 엄습!!

리코 GR 을 놓고왔다는 깨달음이 번뜩!!!

출발한 지 한시간 쯤 지난 거리의 덕평휴게소에서, 차 안을 샅샅이 뒤져도 나오질 않습니다 ㅠㅠ

저 때문에 모두 다시 돌아갈 수는 없어서, 한시간 남은 서울까지 모두 모셔다 드리고 저 혼자 다시 산소에 갈 요량이었으나, 큰아버지가 절대 그럴 수 없다고, 휴게소에 기다릴테니 다녀오라고 하십니다. 결국 아버지와 저만 다시 음성으로 출발했는데….

출발 하자마자 넷째 삼촌에게 전화가 옵니다.

 

“내 가방에 무슨 사진기 같은 것이 들어있다”

 

 후~  기억은 안나지만, 제가 묘를 정리하면서 무심코, 삼촌의 에코백에 카메라를 넣어둔 모양입니다. 고속도로 휴게소를 출발하여 다시 같은 휴게소까지 오는데 20분이 넘게 걸렸고, 불필요한 톨비까지도 지출해야했지만,  그래도 최근들어 가장 행복한 운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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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엔딩의 해프닝을 끝내고, 세 분의 기념촬영.

왼쪽의 선글라스 착용하신 분이 범인?입니다. 자신의 가방에 들어 있었다고 자수하는 장면입니다 😀 그 와중에 우리 아버지는 카메라만 들이대면 차렷 자세를 취하시는 습관을 고이 간직하고 계십니다.

아버지들과의 정이 한층 더 두터워진 벌초 여정이었습니다.

 

 

Contax iia / Carl Zeiss Biogon 21mm f4.5 / Ilford Delta 100

Ricoh GR II

2017.09.03 충북 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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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의 댓글

  1. 첫 포스팅이 너무 좋아요^^
    하회탈 미소를 머금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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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스팅 허락해주시고 용기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밑천이 없고, 소심한 탓에 과연 잘 시작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늘 맴돕니다. 매사가 그런 편이라.. 오히려 이 취미에 빠져든 것, B급을 알게된것을 특별한 인연이라 여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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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문득문득 후벼파는 듯한 사진과 담담한 (듯 보이는) 글 잘 읽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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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과분한 표현에 부끄럽지만, 너무 감사한 말씀입니다. 포르투갈 기행 흥미진진하게 보았습니다. 계속 stay tuned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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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첫 포스팅 축하드립니다. 부담가지시지 마시고 작업에 있어서 또 하나의 동기부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시도때도 없는 포스팅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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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첫 포스팅 축하드립니다. 정감어린 글과 사진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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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맙습니다. 사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던 올 초에 매거진의 “뒷모습 표정”에 대한 LaFesta님의 글과 사진에 크게 감동한 기억이 떠오릅니다. 앞으로도 좋은 포스팅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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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역시나 매거진으로 왔군요. ㅎㅎ
    좋은 사진과 글 감사합니다.
    첫 포스팅 축하하고 자주 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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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전 카메라라곤 핸폰 카메라밖에 없지만 사진을 찍으며 이야기릉 간직하는것은 아주 소중한 일이아 생각합니다. 사진을 찍을때마다 들여진 정성이 엿보이고 가족끼리의 벌초라는 한국만의 문화가 따뜻하게 느껴지는 글이였고 대가족의 화목함이 전달되어져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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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벌초 시즌이군요. 저도 매년 벌초에 참여하고 있긴한데 시뮬라르크님과 마찬가지로 막내인지라
    사진 찍을 엄두가 안나서 카메라는 매번 집에다 두고 다녔습니다. 그나마 핸드폰 카메라로 쉴때 깔짝거리는거 빼고 말이죠.
    벌초 장면도 한번쯤은 내 카메라로 기록해두는 것이 의미 있겠다 싶네요.
    편안하고 푸근한 글과 사진들 넘 좋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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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아비님의 팬으로 매거진을 주욱 지켜보다가 이렇게 저도 소박한 글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감개무량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과 사진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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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격하게 환영합니다. 오늘 매거진에 올라온 미싱보스님의 포스팅 제목처럼 ‘치유로서의 사진’을 함께 즐기고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두번째, 세번째 글 계속 기대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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