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그리고 귀농


5년 전 아버지께서 정년 퇴임을 하셨다.

30년 이상 중, 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다 교장직을 마지막으로 은퇴하시는 명예로운 일이었다. 은퇴 후 뾰족한 계획이 없으셨던 아버지는 아들 내외가 지내는 포항으로 이사를 오셨고, 손자 보는 재미 그리고 정기적으로 만나는 친구 계모임 등으로 한가한 일상을 보내기 시작하셨다.

그런 느슨한 시간으로 1년이 흘렀고, 아버지는 눈에 띄게 빠른 속도로 늙으시는 것 같았다. 엄마 말로는 약속 없는 평소에는 10시까지 늦잠을 주무시다가 소파에서 신문이나 티브이를 보시고, 식사 후에 잠시 산책하다 들어오면 다시 티브이를 보거나 누워계신다 하셨다. 살도 많이 찌셨고 검은 머리는 일부러 흰머리를 심으시는 것처럼 급격히 하얗게 변해갔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보다 에너제틱한 삶을 위해서 수영도 권하고 취미 활동 역시 추천해 드려봤지만, 아버지의 무료한 은퇴 생활은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께서 촌에 놀고 있는 밭에다 뭘 좀 심어볼까 고민 중이라며 혹시 ‘아로니아’가 어떨까 하고 물어오셨다. 4년 전인 그때만 해도 ‘아로니아’라는 과일은 생경했었고, 처음 듣는 과일 이름인 탓에 검색해보니 연결된 주요 키워드가 무려 수퍼푸드, 노화 방지, 항암효과, 항산화의 끝판왕 같은 것들이다. 아 이게 뭔가 건강에 굉장히 좋은 건가봉가 했다. 아버지는 농업 관련 서적도 탐독하시고 작물 재배 관련 카페에 가입하시며 아로니아 공부를 묵묵히 해 나가셨고, 이듬해 덜컥 아로니아 묘목을 1000그루 남짓 심기에 이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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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 없이 잘 자랄 수 있을까라는 걱정도 잠시, 질 좋은 토지와 햇볕에 바지런한 농부의 땀이 더해지니 땅에 꽂힌 꼬챙이 같던 모종들은 여러 갈래 무성한 덤불로 착실히 성장해 나갔다. 보통은 심은지 3년째는 되어야 제대로 수확한다고 하는데 2년 차였던 작년에 벌써 작지 않은 양을 수확할 만큼 아로니아가 일찍이 자리를 잡아가니 모든 것이 처음이었던 초보 농부인 부모님께서는 내심 안심이 되는 모양이었다.

아로니아 수확 3년 차인 올해엔 농장에서 일하시는 모습을 좀 찍어두겠노라 결심했다. 무거운 거 들고 나르는데 옆에서 카메라 깔짝거리는 게 죄송스럽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분명 소중한 순간이 될 것이 분명하기에 지금 남기지 않으면 후회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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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의 이른 첫 수확에 이어 올해는 제대로 풍성할 모양이라며 가지마다 촘촘하게 달린 연두색의 설익은 열매를 매만지신다. 못 보던 과수 운반용 전기수레도 어디서 구해오셨다. 3년 차 농부 아버지는 은퇴 직후의 푸석함을 완전히 벗으시고 또래의 누구보다 탄탄하고 여물어 보이신다. 체중도 적당히 유지하시고 매 끼니 밥맛도 좋다 시니 아들 기분이 참 좋다. 자고 일어나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 내가 필요한 존재라는 가치는 건강한 삶을 담보하는 중요한 전제조건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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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한 아로니아 생과 수확은 7월부터 8월까지 한 달간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는데 8월 첫째, 둘째 주가 아주 피크다. 이 기간은 그야말로 온 가족 동원령이 떨어지는 터라 서울 사는 여동생도 내려와야 하고 아이들은 ‘농촌체험 활동’ 삼아 고사리손까지 보탠다. 보통 열사를 피해 새벽같이 일어나 너덧 시간 작업하고 살을 태울듯한 대낮에는 그늘에서 열매를 다듬다가 늦은 오후로 넘어가면 접수된 주문 확인하여 택배를 부치는 일이 반복되는데, 노동의 강도가 장난 없어서 동원인력 중 체력이 가장 좋은 나마저도 며칠 만에 곡소리를 냈다. 노동의 강도가 이렇다 보니 당연히 부모님 체력과 건강이 무척 걱정되던 차에 결국 사달이 나고야 말았다. 몇 주 내내 묵묵히 일하시던 엄마한테 대상포진이라는 고통스러운 놈이 와버렸다. 어질어질한 현기증에 몇 번 넘어질 뻔도 하셨는데, 증상이 두통이다 보니 두통약과 진통제 처방으로 며칠 버티셨다고 했다. 며칠이 지나도 약이 듣지 않아 종합병원을 가셨는데 알고 보니 달팽이관 신경 쪽으로 발생한 대상포진이라 균형감각에 문제가 있었다. 엄마는 곧장 입원하셨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3~4일 안정을 취하면 나을 정도로 심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게 무리하지 말라 그리 말씀을 드렸건만.. 병원 첫날에는 끼니도 힘겨워하시던 엄마였지만 링거액과 충분한 잠으로 다행히 금방 기력을 회복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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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은 귀향이다’라는 말이 유행할 만큼 은퇴 세대의 아내들은 남편 따라 시골로 들어가는 걸 감옥살이 버금가는 것으로 생각한다는데 도시가 고향인 엄마는 아버지를 따라 순순히도 촌구석으로 들어가셨고 당신 몸 돌볼 생각도 않은 채 힘든 농사일로 무리까지 하셨다고 생각하니 곁에서 챙기지 않은 아버지가 야속하기도 했다.

엄마가 자리를 비운 사이 아버지는 일꾼을 부려 남은 일을 거의 마무리하셨다. 엄마가 입원하는 해프닝까지 겪으며 어렵게 써 내려가는 2017년의 귀농일지.. 하지만 퇴원 후 다시금 건강한 웃음을 되찾으신 어머니와 은퇴 후 퍼석한 삶에 빠지셨던 아버지의 건강한 변신만은 두 팔 벌려 환영하고 응원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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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어깨 너머로 20년 뒤 내 모습을 잠시 그려본다. 나도 아버지의 땅에서 무언가를 심고 있을까? 사진과 나는 어떤 사이일까? 누구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 혼자 피식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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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의 댓글

  1. 부모님들은 이제 좀 쉬엄쉬엄 하실만도 한데, 가 보면 역시 부지런한 삶을 살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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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저는 어려서 농장에서 살았는데~ 재개발 때문에 아파트로 이사했었습죠.
    사실, 아부지께서 전공이 원예인데~ 젊은시절 국화전시회에서 상도 받으셔서~ 창덕궁에서 근무도 하셨고~
    그러다 저희 아부지께서도 정년 퇴직과 동시에~ 다시 텃밭을 시작하셨습니다.
    물론 군대 다녀 온 저는~ 특유의 육군적 삽질을 바탕으로~ 다시 시작된 텃밭 밭고랑은~ ㄷㄷ 아~ 아닙니다.

    저희집은 감나무와 매실이 주력인데~ 아부지께 비공을 다 전수 받지 못해서~
    하여간 저도 배우면서 전정작업을 하고 살아요.

    그리고~ 작년에 매실 수확할 적에~
    무리하신 저희 어머니께서도 이명증이 심하셔서~ 입원을 하셨었습니다.

    암쪼록~ 주아비님 부모님 건강~ 또 건강하시길 기원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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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원드립니다.
      (글 중간 중간 딴 일 하다 쓰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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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떼님 특유의 화법은 역시나 매력적입니다. 글 읽는 것만으로도 재밌어요. ^^
      부모님에 대한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네요. 매실과 아로니아, 어머님의 입원..
      농사일은 정말 여자에겐 힘든 일인것 같아요. 일할때 다 같이 일하다가 참 먹을때나 식사시간에 또 그거 준비하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하는 상황이더군요.
      모쪼록 보떼님 부모님 건강도 진심으로 기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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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그래도 아버님께서 활력을 찾으신 거 같아서 다행이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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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부는 과거 중동산업역군처럼 검붉게 태닝하셨지만 배도 들어가고 생기가 넘치시니 자식으로서도 기분이 좋습니다.
      두 분이서 소일삼아 시작한 일인 만큼 무리하지 않는 선에 즐기시길 바랄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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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이야기 참 잘 만드네요.
    아름다운 이야깁니다.
    이 곳이 습작의 좋은 터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보람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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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처음 매거진에 글 올렸을때 5개 많아도 10개가 한계일거라 생각했는데
      (읽으시는 분들은 비록 고통스러우시겠지만) 비급은 습작을 이어가는 동인으로서 충분합니다.
      혼자가 아닌 같이의 힘을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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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주아비님 노후는 걱정이 없겠어요.
    두분 오래오래 건강하게 행복하시길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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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은퇴 후 분명히 뭔가 일거리가 있어야 더 건강하고 활기찬 제2의 삶을 사시는 것 같습니다. 때 되면 대민지원 나가야하는 처지, 그리고 역시 교직에서 은퇴한 아버지가 계시다는 점에서 여러가지로 공감이 되는 글과 사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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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좋은 사진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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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오래오래 건강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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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아 좋습니다. 숙연해지고, 따뜻해지며, 자연스럽게 미소가 지어집니다. 좋은 사진과 글 잘 보았습니다. 진단하기 어려운 부위의 대상포진까지 앓으신 어머님 얘기에 좀 놀랐지만, 잘 대처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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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한참을 읽고 보고 내려오다가 마지막 사진을 한참 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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