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전야


글빨은 안서고 맘만 바쁘다. 월세방 보증금 빠지듯 고통스러운게 밀린 포스팅이다. 평생에 꼬박꼬박 해 본 일이 없는데 한주마다 하나씩 사진 달고 끄적여서 포스팅한다는게 이거 참 고역이다. 지난 낙서들을 뒤적였지만 마뜩찮다. 그러다가 찾은 폴더 ‘스페인’ 그러니까 마빡이 뚫어져라 뜨겁던 2014년 여름 FC바르셀로나에서 레알 마드리드까지 다녀왔었다. 취향 따위는 1그램도 첨가되지 않은 전투일정으로 끌려다니느라 어딜 갔는지 뭘 먹었는지…웬만하면 찍은 사진보면서 추억할만도 한데 이것 조차 쉽지않은 여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끄적여 두었던 기록들을 다듬어 몇 편으로 묶어본다.
아내는 여행의 기억을 엮어서 책을 만들었다. ㅠㅠ

R0007503
[공항가는 길]

여행전야(2014. 7. 31)

끝물 장마에 잔뜩 습기 머금은 더위가 맹위를 떨치던 지난 화요일, 아이들과 시내나갔다. 교보문고, 알라딘 중고서점, 교동시장 빈대떡, 악세사리 가게, 들어오는 길엔 서른 한가지 아이스 크림 가게에서 늘어지기까지 매번 비슷하게 돌아 나오는 코스다. 아이들이 교보에서 악세사리 삼매경에 빠져 있을 때 먼저 중고서점으로 왔다. 검색창에 몇 분의 이름을 넣었지만 행운은 없다. 고전 몇 가지 더 검색해 보지만 맘에 드는 책이 없다. 문득 ‘신영복’ 선생 생각이 났다. <더불어 숲 1, 2> 오천원, <나무야 나무야> 이천사백원, <처음처럼> 사천구백원. 쓸어 담듯 바구니에 담았다. 모두 해도 책 한권 값이니 부자 된 것 같다.

아이들을 기다리는 사이 구입한 책을 펼쳤다. <더불어 숲> 1편 이다. 습관대로 호구 조사부터 시작한다. 1쇄 출판일이 1998년이다. 이때 나는 무척 바쁜 사람이었다. 견디고 견뎌서 남보다 한발짝 앞서가야 했으니까. 성공, 학위, 효율, 합리화, 구조조정 따위의 키워트가 IMF의 혼돈과 함께 머리속을 채우고 있을 때다. 이 무렵 이 책을 만났더라도 감흥 없었겠지!

낡은 책안에는 책갈피처럼 엽서 한장이 들어 있었다.

~~~~~
To: 경아
23번째 생일 진심으로 축하한다. 만난지는 오래됐는데 생일은 한번밖에 챙겨주지 못한 것 같다. 나이를 어디로 먹었는지 우리는 마냥 어린애 같은데… 하지만 나이 값을 하기 위해선 더욱 열심히 살아야겠지? 뭔 말이여…여하튼 축하해.
98. 8. 21
진선.
~~~~~

손 글씨로 눌러 쓴 엽서가 시간을 꾹꾹 눌러 놓은 것 처럼 선명했다. 좋은 책을 골라 선물한 지혜롭고 착한 진선이와 좋은 친구를 둔 경아가 불혹의 문턱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지 궁금해 졌다. 그녀들은 아직도 서로의 생일을 축하해 주고 있을테지. 덕분에 한 동안 따뜻하고 촉촉했다. 엽서 덕분에 시간을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설명할 수 있는 사례를 발굴한 것 같아 흡족했다. ‘이긴다’는 것은 대결구도의 투쟁에서 상대를 누르거나 멸하고 일어서는 곳이 아니라 견디는 것이다. 이렇듯 시간을 거슬러 오롯이 살아 있는 글을 대할때면 장구함을 느낀다.

엽서를 갈무리하고 책을 펼쳤다. 책은 선생이 세상을 주유하면서 각지에서 보낸 엽서를 엮은 것이다. 글을 쓰기 위해 간 여행이었는지 여행 가운데 쓴 글인지 짐작할 수 없지만 나직하고 정갈한 목소리로 여행지에서의 단상을 전한다. 첫 대목이 스페인 우엘바 항구의 산타마리아호 앞에서 쓴 글이다. 순간 ‘운명이 데려다 준 끌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이 엽서를 적고 있는 이 항구는 작은 마을입니다. 그리고 과거의 마을입니다. 그러나 이 곳은 지중해와 대서양이 만나는 곳이며 유럽과 아프리카가 가장 가까이 닿은 곳입니다. 두 대해와 두 대륙이 만나는 곳입니다. 내가 이 곳을 가장 먼저 찾아온 이유는 이 곳이 바로 500년 전에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향하여 출항한 항구이기 때문입니다._더불어 숲1 16p.”

새로운 천년이 시작될 무렵 약탈과 살육의 세기를 열었던 그 출발지에서 선생은 다시 새로운 천년을 생각했던 것 같다.

풀어야할 숙제를 남겨 두고 떠나는 여행이다. 많은 것을, 큰 것을 기대하는 것은 욕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만큼은 가득 담아 돌아올 수 있으면 좋겠다.

카테고리:Drifting, Essay태그:, , ,

1개의 댓글

  1. 운남성만 가신게 아니었군요 ㄷ

    Liked by 1명

  2. 형수님이 쓰셨다는 책 무지 궁금합니다 ㄷㄷ 비급 공구 안하나요?

    Liked by 1명

  3. 형수님 축덕이셨어… ㄷㄷㄷ

    Liked by 1명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

%d 블로거가 이것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