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있는 풍경 – 구마모토성과 가토 기요마사


어린이날로 이어지는 토,일,월 황금연휴를 놓치지 않고 5월 2일(금)에 월차신공을 더해 3박 4일 일정으로 규슈(九州)로 향했다. 규슈를 찾는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하우스텐보스나 유후인으로 향하곤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다지 흥미있는 곳이 아니었다. 규슈에 가게되면 꼭 가고 싶은 곳이 있었다. 바로 가토 기요마사의 성인 구마모토성이었다. 후쿠오카 역에서 쓰바메 특급을 타고 내린 구마모토역에서 구마모토 성까지 도보로 이동하며 곳곳의 모습을 스냅으로 담으며 1시간 정도 후 도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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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성은 마침 축성 400주년을 맞이하여 올해동안 계절 단위로 나눈 축제가 계속되고 있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폈을 3월 중순 ~ 4월초였다면 더욱 끝내주는 풍경을 보여줬겠지만 그만큼 붐볐을 생각을 한다면 뭐 이 정도 시점도 나쁘지 않아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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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성 입구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구마모토성의 주인공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加藤淸正)의 동상이다. 일본 특유의 갑옷 형태와 무사계급들의 상징이던 두 자루의 칼, 가토가 즐겨썼다는 긴 형태의 특이한 투구와 원모양의 문양까지 조각되어 있는 섬세한 형태다. 수많은 일본 관광객들이 이 동상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고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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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선 흔히 한자 발음 그대로 가등청정이라고 많이 부르는 가토 기요마사는 임진왜란을 떠올릴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 다음가는 정도의 유명세(?)를 보유한 일본의 맹장이었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일본의 많은 장수들 중 유독 가토 기요마사의 이미지가 강렬한 것은 동대문을 통해 한양에 입성하고 선조의 왕자들을 포로로 잡은 전공 외에도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을 함락시키고 성안의 모든 사람과 가축까지 몰살시킨 잔인함 때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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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성에 한국인 관광객은 보이지 않았다. 이 동상과 그 앞에서 즐겁게 사진을 찍는 일본인들을 보며 이들이 과연 이 녀석이 저지른 잔인한 학살극을 알기나 할런지 하는 생각이 들며 우리에게 원수와도 같은 가토 기요마사가 일본에선 영웅으로 추앙받는 사실이 못내 씁쓸하기 그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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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기요마사 동상 아래에 있던 영문 설명문. 그의 삶을 간단히 요약한 이 설명에서 세키가하라 전투에 대한 언급만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일본의 패권을 놓고 동군과 서군이 대회전을 벌인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가토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편에 섰고 눈부신 전공을 세운 결과 이 곳 구마모토 일대에 영지를 하사받고 7년에 걸쳐 성을 세웠다. 정작 우리에게 가토의 이미지를 강렬하게 심어준 임진왜란에 대한 얘기는 빠져있는데 2차대전 패전 이후 일본은 침략전쟁인 임진왜란에 대해 굳이 언급하기 싫었을테고 규슈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기에 민감한 사안이라 판단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난 오히려 그래서 구마모토성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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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로 된 안내도 충실하다. 허접한 번역으로 인한 어색한 표현과 오류가 보이지 않는 완벽한 수준으로 규슈는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곳임을 실감케 한다. 위 설명에 나오는 수많은 실전 경험 중의 하나가 정유재란 당시 울산성 전투로서, 이 전투에서 얻은 교훈이 구마모토성 건축에 영향을 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뒤에 보기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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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성 외곽의 해자. 이건 뭐 참호같은 수준이 아니라 거의 강이다. 상당한 폭도 폭이거니와 둑의 높이에 더해진 축대의 높이 만으로도 공격군의 기를 질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주로 북방 기마민족을 상대해야했던 우리나라의 기본적인 방어 전략은 전쟁 발발시 평지에서의 접전을 피하고 산성으로 민관군이 이동하여 수성전을 펼치는 방식이었지만, 일본은 19세기까지도 막부 체제 하 지방 영주들이 독자적인 군사력을 보유하며 각자의 영지에서 성을 쌓고 살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후 일본은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맞이했지만 서로가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의 전국시대를 겪으며 일본의 성은 철저하게 실전적인 형태로 발전했다. 일본의 성은 영주가 거주하는 작은 궁궐임과 동시에 방어 시설이 되어야 했고 지형에 의지한 우리의 산성과 달리 평지에 있어야 했다. 그래서 일본의 성은 이처럼 해자의 폭과 성벽의 높이에서부터 우리와 크게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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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성벽 위에는 위처럼 조총을 쏠 수 있는 총안구가 빽빽하다. 16세기 무렵 유럽에서 도입된 조총은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조직적으로 사용되기에 이르렀고 잘 알다시피 임진왜란에서 왜군의 조총에 조선군은 크게 당황했다. 일본의 성은 이 처럼 사수가 완전히 보호를 받은 상태로 사격이 가능한 형태로 이루어져있어 실제 외부에서 내부의 사수를 조준해 명중시키기는 어려워 보인다. 반면 우리의 성곽은 총,포의 활용이 높아지는 임진왜란 이후에도 크게 변화하지 못해 신미양요 당시 우리 군사들은 초지진 성곽 위에서 상체를 드러낸채 사격하며 미해군 육전대를 상대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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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성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인 꺾어진 출입구의 모습. 성문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ㄴ’,’ㄷ’자형 등으로 꺾인 길을 통과해야 하는데 덕분에 성문은 외부에 노출되지 않아 화포나 공성기의 공격으로 부터 보호될 수 있으며 성문으로 도달하는 동안 방향을 틀어야하는 공격군은 전방과 좌우에서 날아오는 화살과 총탄으로 부터 몸을 숨길 곳이 없다. 우리나라에도 이와 같이 성문을 보호하듯이 성문 전면에 반원형으로 옹성을 친 형태(동대문)가 일부 있긴 하지만 일본의 성처럼 보편적인 설계방식은 아닌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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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성 안에서는 축성 400백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진행 중이었다. 위 사진은 더운 날씨에 구마모토성의 마스코트 분장을 하고 고생 중인 어느 녀석과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퀴즈를 내는 진행자인데 일본어를 전부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질문의 내용은 대략 ‘구마모토성을 지은 사람은 누구일까요?’였다. 답은 당연히 가토 기요마사였고 곁다리 답안으로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같은 유명한 인물들이 거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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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성의 가장 핵심부인 혼마루 쪽은 입장료를 지불해야했다. 500엔이었나. 상당히 저렴한 편인 우리나라 문화재 입장료 기준으로 봤을 때 제법 비싼 편이었지만 그럼에도 성 안엔 많은 인파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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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성의 중심, 일본식 성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텐슈가쿠(天守閣). 엄청난 높이의 기단부 석축 위에 우뚝 솟아있다. 구마모토성은 일본의 3대 성(城) 중 하나로 꼽힐만큼 그 규모와 예술성이 뛰어나다고 하는데 실제 2004년 오사카성을 찾았을 때 보다 더욱 인상적이었다. 사실 그 때는 일본 역사와 문화에 대한 기초 지식이 너무 부족해서인지 보이는 것이 별로 없었던 것인지도. 아는 만큼 보인다. 이 말은 정말 진리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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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웅장한 건물을 보고 있노라니 살짝 화가 나기도했다. 우리나라를 쑥대밭을 만들어 놓고 가토는 자신의 영지에서 이처럼 웅장하고 강한 성을 짓고 부귀영화를 누렸단 말인가. 안타까운(?) 점은 이 웅장한 모습도 원형이 아닌 콘크리트로 지어진 복원된 모습이라는 것이었다. 구모모토성은 19세기 세이난(西南)전쟁에서 많은 건물이 불타 사라졌다. 실제 일본 관광 안내서에서 볼 수 있는 웅장하고 멋진 목조건물들은 대부분 애초의 모습이 아니라 복원된 것들이 많은데 특히 2차 대전 당시 미공군 B-29 폭격기에 연일 융단 폭격 당했던 도쿄나 오사카 등 일본의 주요 도시에 있던 유적들이 특히 그렇다. (교토는 미군의 폭격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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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유적, 구마모토성 안에 있는 우물이다. 안내판에는 가토 기요마사가 농성(籠城)에 대비해 구마모토성 안에 우물을 120여 곳이나 팠다고 적혀 있었다. 이 많은 우물이 바로 성 입구에서 봤던 ‘수많은 실전 경험을 살려’ 성을 건축했다고 한 부분 중 하나인데 일본 녀석들은 중요한 사실 하나를 생략하고 있다. 가토 기요마사가 이처럼 집착으로 보일 정도로 많은 우물을 파게 된 계기는 바로 정유재란 당시의 울산성 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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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사로병진책의 일환으로 조명연합군은 울산성의 가토 기요마사, 사천성의 시마즈 요시히로, 순천성의 고니시 유키나가를 육군이 공격하고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순천성 외곽을 차단하여 함포 사격을 가하며 공격을 지원하는 한편 고니시의 탈출을 가로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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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가토가 주둔하고 있던 울산성의 상황이 왜군 입장에서는 가장 절망적이었는데 성을 완전히 포위한 조,명 연합군은 치열한 공격을 퍼부어댔다. 성안에 고립된 가토의 군사들은 갈수로 인해 처절한 경험을 해야했고 밤에 물을 뜨러 태화강으로 내려오는 왜군들은 조명 연합군의 매복에 걸려 많은 피해를 입어야 했다. 그럼에도 가토 기요마사는 악귀처럼 성을 지켜냈고 역시 가토의 군사들이 주둔하던 서생포성에서 원군들이 태화강 하구로 밀려오며 결국 조명연합군은 막대한 인명피해만 내며 퇴각하고 만다. 하지만 그 기간동안 울산성의 왜군들은 물이 없어 말을 잡아 피를 마시고 소변을 받아 마시기도 했으며 식량이 떨어진 후 성벽의 흙을 긁어 먹을 정도로 처절한 시간을 보내야했다. 심지어 가토는 할복 자살을 생각하기까지 했다고 하니 그가 구마모토로 돌아와 성 안에 우물을 120여개나 팠다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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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성 전투도. 울산성은 지금의 학성공원이다. 성곽의 흔적은 많이 남아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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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각으로 들어가는 바로 입구 쪽도 만만치 않은 경사의 성벽과 굽이굽이 계단과 통로로 성 내부에 진입한 적들이라 해도 본부격인 천수각을 침범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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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각으로 들어가는 입구. 2004년에 갔던 오사카성과 달리 구마모토성의 천수각은 내부 개방이 되어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내부는 애초 60년대 복원 당시 부터 박물관 형식으로 지어져 있었다. 원형 그대로의 복원이란 측면에서는 다소 불만족스럽지만 건물의 유지와 보수, 활용성 측면에선 합리적인 선택인 듯 했다. 저 문양은 가토 가문에서 쓰인 것 같았다. 가토의 투구는 물론 그릇 같은 생활 용품에도 빠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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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놈의 우물은 천수각 안에도 또 있었다. 정말 울산성에서 고생 많이 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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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주인공,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초상. 이순신 영정이나 다 똑같이 생긴듯한 논개, 춘향이 영정 그림 처럼 상상의 그림이 아닌 당시에 직접 그렸던 것으로 보인다. 선입견인지는 모르겠으나 德이 느껴지는 상은 절대 아니다. 눈빛에선 냉정함과 교활함이 보이는 듯도 하고 감히 마주 보지 못할 강한 포스도 느껴진다. 일본에서 이처럼 그림이 남겨진 이들은 당시에 권력이 있던 이들이고 당연히 대부분 무사계급이었으므로 우리 선비들의 상에서 느껴지는 이미지와 달리 험상궂고 거칠고 냉정한 인상들이 많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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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요마사公의 생애’라는 전시코너 쪽엔 태어날 때의 일화부터 동네의 분쟁을 해결하는 대범함과 판단력을 보여준 성장기의 가토의 모습 등을 다루고 있었다. 가토 기요마사는 분명 일본의 영웅 중 하나로 추앙받는 듯 했다. 특히 군사 뿐 아니라 건축, 토목 등 다양한 방면에 재주가 많아 오늘날 구마모토현의 기본적인 토대를 만들었다고 한다. 영지로 부임하는 가토의 모습을 그린 그림에 묘사된 뱃머리에 서서 붉은 갑옷을 입고 서있는 가토의 모습은 그야말로 위풍당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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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투구가 위의 그림에 나오는 긴 형태의 투구. 가토 기요마사가 직접 썼던 바로 그 투구라고 한다. 다른 장수들의 투구와 달리 전투에 적합한 형태는 아니지만 가토의 이미지를 각인시키는데 좋은 독특한 모양이다. 가토가 저걸 쓰고 조선에도 왔었을거란 생각이 드니 400여년의 시간이 무색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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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각 꼭대기 층에 가까워 올 수록 전시물의 내용은 구마모토성이 불탔던 세이난(西南)전쟁 관련 내용이 주를 이루기 시작한다. 사쓰마 군이 맹공을 펼치고 있고 구마모토성에서 군사들이 농성하고 있는 그림이다. 아쉽게도 세이난 전쟁에 대한 사전 지식은 거의 없었다. 관련 내용은 더 공부해봐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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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는듯한 더위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줄을 지어 겨우 올라간 천수각 꼭대기에서 내려다 본 풍경. 천수각은 구마모토시 전체를 거의 조망할 수 있는 사령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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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까마득해 보인다. 우리나라에도 황룡사 9층 목탑이 남아있었다면 어땠을까 아쉬운 마음도 들지만 몽골군에 의해 불타지 않았어도 숭유억불 정책의 조선에서 무엄하게 높은 그런 건물이 살아남긴 어렵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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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게 올라간 천수각을 내려와 전 날 편의점에서 사둔 샌드위치로 점심을 대충 떼우고 성을 빠져나와 다시 걸어걸어 구마모토역으로 돌아왔다. 사실 이 날 의외로 빡쎈 왕복 도보 이동경로와 천수각 내부에서의 지체현상에서 체력소모가 커 후쿠오카로 돌아가서 들르기로 계획했던 후쿠오카 타워와 후쿠오카돔은근처에도 못가고 호텔에 뻗어 있었다. 그렇지만 최우선 순위로 잡혀있던 구마모토성을 봤기에 그 정도쯤은 생략해도 별로 아깝지 않았다. 이번 구마모토성을 찾음으로써 가토가 지은 성 3곳이나 답사한 셈이 됐다. 가토가 조선에 장기 주둔하며 지었던 울산성과 서생포왜성, 그리고 이번 구마모토성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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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기요마사라는 한 인물도 그렇지만 일본이라는 나라처럼 복잡한 생각이 교차하는 나라도 많지 않을 것이다. 일본을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할런지 모르겠지만 일본과 영향을 주고 받으며 수천년을 마주해온 우리는 또 앞으로 그렇게 일본과 손도 잡고 싸우기도 할 것이다. 구마모토성을 빠져 나오면서도 내 머리속에는 일본과 가토 기요마사에 대한 여러가지 생각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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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규슈 구마모토

Canon A700 (허접 똑딱이 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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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의 댓글

  1. 2010년 학회발표로 구마모토에 며칠 머물렀던 적이 있습니다.
    발표가 끝나고 주변을 구경하다가 구마모토 성에 가볼려고 나섰는데,
    지도도 안보고 그냥 담을 따라 쭈욱 걷다 보면 정문이 나오겠지 하는 마음으로 걸었어요.
    그런데 정말 우연치고는… 저는 정문을 조금 벗어난 위치에서 걷기 시작했던 겁니다.
    몇시간을 그렇게 성외각을 따라 걷다가 정문에 다다라서는 너무 힘들어 그냥 이걸로 본걸로 치자는 맘으로…
    대신 그 당시 구마모토라는 도시의 소소한 일상풍경은 정말 바로 가까이서 접하게 되는 경험을 했어요.
    저번 지진으로 성에도 피해가 좀 있다던데… 저네들은 아마 얄밉게도 복구 잘 해뒀을거예요.
    그때 우연히 들러서 먹었던 돈까스집의 알바 여학생이 참 이뻤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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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다 읽고 나서 맨 아래를 보니 카메라 기종이 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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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나도 짱꼴라 역사 한대목 해야하나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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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역시나 글을 풀어내는 솜씨가..
    엄지 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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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피요님의 해박한 역사 지식에 다시 한 번 놀라고 갑니다. 대단하세요,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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