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먹으러 가는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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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가 대학원 공부모임에 가서 늦게 들어온다고 해서 태은이랑 오랜만에 집에서 말고 바깥에서 저녁을 먹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집앞에 쌓아놓은 저 책들은 책벌레가 다량 발견된 헌책들. 버리려고 비닐봉다리에 넣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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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골목 안쪽에 저 집은 한동안 매우 낡은 한옥이었는데 신축을 하는건지 갑자기 하루이틀만에 집을 몽땅 초토화를 시켜놨다. 그런데 날이 더워서인지 몇일 전부터는 인부도 보이지 않고 진행이 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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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골목에 어느샌가 생긴 정체불명의 가계. 카페도 아닌것이 갤러리도 아닌것이 뭔가 끊임없이 행사를 하고 있는데.. 지금은 주인장이 발간한 시집과 관련한 행사를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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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은아 아빠 봐봐.. 언제나 그렇듯 사진을 찍던 말던 무심한 태은이. 별로 의식을 하지 않는다. 그냥 찍나보다 찍던지 말던지하는 느낌이랄까. 천성이 나랑 비슷하다. 오늘 학교 체육시간에 피구하다가 얼굴을 맞아서 오른쪽 눈 아래가 살짝 까져서 반창고를 붙여놨다. 별로 아프지는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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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는 길에 담넘어 보이는 집의 기와가 이뻐서 찍을랬는데 바보같이 앞에 보이는 나무에 촛점을 맞췄다. 날이 어두워서 조리개를 개방으로 찍었더니 기와는 보이지도 않네. AF가 안되니깐 이런게 불편하다. 점점 노안이 오나보다 ㄷ 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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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낮시간에 조리개를 맨날 f/8 정도 놓고 촬영하는게 일상이다보니 개방조리개를 쓸 일이 없다. ASA100 짜리 필름이고 날도 어둑어둑하고 개방조리개로 이런거나 함 찍어보자 했는데 다행이도 촛점은 잘 맞는 것 같다. 열라 의미없는 샷이다. 텔레비전에서 쓸데없는 거 하면 전파낭비란 소리를 하던데 이런건 필름낭비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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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은이랑 통인시장을 가로질러서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가다가 중간에 좁다란 골목에 꽃이 보인다. 뭐 물론 평소에 안찍는 컨셉이지만 오늘은 한번 찍어본다. 이럴 때 아님 언제 개방조리개로 함 찍어보나. 그나저나 이 꽃 이름이 뭐지? (서촌 살면서 통인시장에서 한번도 사진 안찍은게 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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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수요미식회인가? 소머리국밥을 파는 인왕식당이 나왔다고 하던데 사람하나 얼씬않던 이 가계에 사람들이 몰리니 옆 건물도 덩말아 갤러리로 바뀐다. 재빠른 사람들이 참 많다.. 태은이는 역시나 아빠 또 사진찍네 하는 무심한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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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네에 보면 집앞에 화분을 가져다 놓은 집이 참 많다. 여기 보이는 이 정도는 진짜 약과. 집이 좁고 마당이 없다보니 골목에 화분을 두는 집이 많다. 가끔 어떤 골목은 정말 화원이 따로 없을 정도로 화려하고 풍성한 곳들이 있다. 이런게 생활의 아름다움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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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밥먹을 식당이 가까워져온다. 저기 보이는 저 가로등이 있는 건물은 이 동네에 오래된 한의원. 입구에 내가 좋아하는 돼지조각이 놓여있다. 실물로 보면 진짜 재미나게 생겼다. 들를 일 있는 사람들은 한번 인증샷. 분명 로또의 은총이 올 것이다. 아무튼 나는 평소 많이 찍으므로 오늘은 생략하고 그냥 가로등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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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나무는 뭔가 한참 골똘히 봐도 각이 잘 나오지 않는다. 문을 열고 들어가 집안의 아주 좁다란 공간에 놓은 화분이 자라 바깥으로 나온건가? 아무튼 콘크리트 사이로 식물이 비죽 튀어나온걸 보면 어떤 환경에서든 인간은 저마다의 의미를 부여한 공간을 만들며 따스하게 살아간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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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콘을 보아하니 이 집도 거실에 에어컨 하나 그리고 침실에 조그마한 벽걸이 에어컨 하나. 이렇게 각이 나오네. 우리나라는 땅덩어리가 좁다보니 뭘해도 다 비슷비슷하게 똑같은 것만 하고 사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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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국수를 먹고 싶긴한데 태은이를 저녁을 밥을 먹여야지 국수를 먹일 수는 없지. 그런데 이런 생각도 고루한건가? 암튼.. 저 집은 가본집은 아니라 맛있는지는 모르겠다. 근데 사실 서촌에서 이 골목에 있는 집들은 다들 고만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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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새로 개업한 수박주스집이 보인다. 근데 수박으로 안보이고 씨발씨발 하는걸로 보이는데.. 뭐 눈에는 뭐만 보이는건가? ㄷ ㄷ 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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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지나친 한약방을 되돌아서 다시 보기.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노트를 보면 사진을 찍고 그 자리에서 바로 뒤돌아서 그냥 일단 찍으라는 이야기가 있다. 보는 것과 찍는 사람의 의도와 뭐 그런 관계와 관련한 이야기로 알아듣고 있는데. 나도 사람인지라 뒤돌아도 뭔가를 또 찍으려고 하지 무심하게 그냥 의도의 반대편을 찍는건 잘 되지 않는다. 암튼 이 각도에서는 한약방 돼지가 보이지 않는다. 귀여운 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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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드디어 오늘의 목표지점인 옥이네밥집. 서촌의 젤 문제점은 사실 이곳이 거주지 치고는 진짜 맛집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다들 타겟을 서촌에 놀러온 관광객들 대상으로 하고 있고 거주민들이 가볍게 먹을 만한 집이 그닥 많지 않다는거다. 그러니깐 뭐 그런거 있잖은가 그냥 된장찌게 김치찌게 그런거 먹는 곳. 서촌에 연인이랑 놀러온 젊은 쌍쌍족들이 주말에 된장찌게를 먹을리는 없지. 암튼 나는 태은이랑 오늘 여기 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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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 반도 안찍었는데 벌써 다 왔네. 지금 저녁 7시라서 밥먹고 나오면 깜깜해질텐데. 아쉬워서 옆에 있는 가계에서 또 한 컷. 여기 대오서점은 우리나라 최초의 헌책방이라고 해서 유명하고 사람도 많이 찾던데 내가 볼 땐 넘 키취적이라서 진짜 맘에 안든다. 뭐 그것보다 옛날에 처음에 여기 왔을 때 사진을 찍으려니 지키고 서있던 주인아줌마가 사진 못찍게 해서 황당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인지 서촌에 오래 살면서도 여기 아직 못들어가봤다. 암튼 여기 진열장에 넘어져있는 아톰은 맨날 누워있는데 일으켜세워주지도 않나. 델타100 필름으로 찍었더니 샤프니스가 좋아서인지 개방조리개도 그냥저냥 볼만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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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서촌에 찾아보면 철물점이나 공구상, 인테리어 비스무리한 집들이 진짜 많다. 내가 아는 철물점만 6-7곳이 넘는 것 같다. 아파트가 아니라 오래된 낡은 주택이 많아서 그런가보다. 그나저나 이 동네 뜨고나서 가계들의 흥망성쇄가 꽤나 심한 곳인데 간판집이 생각보다 없는거보면 다들 외지인들이 중계업자 끼고 들어와서 가계 오픈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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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을 살면서 진짜 자주 보는 풍경중 하나가 쉴세없이 골목을 달리는 오토바이이다. 정말 잠시 골목을 걸어도 오토바이 5-6대는 보는 것 같은데 맘잡고 날잡아서 죽치고 않아있으면 서촌의 오토바이 주제로 진짜 사진 많이 찍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난 게으르니깐 그렇게는 못하고 오가다가 잠시 찍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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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은이랑 밥먹으러 나가면서 오늘 총 20장 찍었네.. 아직 16장이나 남았는데.. 나는 성질이 급해서 내일까지 못기다리고 바로 현상을 해야지.. 암튼 나는 순두부찌개 태은이는 참치김치찌개를 먹었음. 취나물 맛있던데 또 먹고 싶다. 밥을 다 먹어가던터라 미안해서 한접시 더달라고 말 못하고 나왔음. 사진 다시 보니 후회되네 ㄷ ㄷ ㄷ

..

Leica MP, Summicron 50mm f/2 DR, Ilford Delta 100, Ilford Ilfotec DD-X

 

카테고리:Drifting

1개의 댓글

  1. 학회 땜에 지난 목요일에 서울 갔다가
    금요일 저녁에 경복궁역 근처에서 일하는 죽마고우 만나서
    서촌 입구까지 가서 밥 먹고 돌아와서 그런지 조금 더 친근감이 느껴집니다 ㅎ
    (시레기가 들어 있는 닭볶음탕 먹고 왔습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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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툭툭 던지듯 찍어놓은 사진들에 저도 태은이랑 같이 꼽사리 껴서 밥집 가는 기분입니다.
    늘 접하는 주변 풍경들에 대한 코멘터리도 된장찌개 맛 나고요~ 잘 보고 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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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꽃은 옥잠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사진도, 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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