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동


추운건 딱 질색이다.

거짓말 안보태고 1년에 한여름 석달 빼고는 그늘에만 들어가도 한기를 느끼는 체질 탓에 나는 겨울이 가장 싫다. 늦가을만 되어도 내복 꺼내입기 시작할 정도니 내 생각에도 추위 참 많이 탄다. 그렇다. 내 사전에 목욕탕 냉수마찰 따위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거다.

그런데 사진을 좋아하면서부터는 해마다 겨울이되면 의례히 보이는 설경사진들이 어찌나 멋있는지.. 모니터 너머 꿈같은 풍경들을 한번이라도 찍어볼 수 있다면 뽈때기 터질듯한 추위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포항은 꽤나 따뜻한 편이다. 서너해 건너 한번씩 폭설이 오기도 하지만 바로 윗동네인 강원도에 비하면야 눈이 귀한 동네다. 설령 운이 좋아 밤새 내린 눈으로 온 세상 코튼으로 씌워놓은 마냥 하얀 어느 겨울 아침이라 하더라도 출근을 해야하는 평일인 경우가 많았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설경촬영은 그저 나랑 1도 관계없는 그러니까 눈이랑 친한 동네에 살거나 혹은 삶이 여유로운 이들의 전유물일 뿐이었다.

아랫배가 땡겨 화장실 가려 일어난 어느 겨울 새벽, 창 밖에서 거실로 들어오는 파리한 빛이 평소의 그것이 아님을 직감했다. 특별한 감각의 정체를 확인하러 창으로 다가가니 이미 세상은 하얗게 변해있었다. 오늘이 무슨요일이지? 그렇다. 오늘은 토요일이다. 이내 방한채비를 단단히 하고 효자동에 내린 간달프의 마법을 카메라에 수집하기 위해 현관을 나섰다.

.

hyoja-1

.

.

주말인데다 이른 시각 탓에 도로를 서행하는 차량 몇 대를 제외하고는 인기척이 없다. 동녘에서 고개를 드는 노오란 햇살이 효자동 골목에서는 어느 담 어느 건물이 높고 낮은지 키재기 경연을 벌이고 있다. 익숙하디 익숙한 효자동은 순백의 화장으로 낯설었다. 철길 건너 만물수퍼 앞 비질하는 아저씨 그리고 설경에 신난 동네 똥개를 모델로 대여섯 컷을 눌렀다. 필름 카운터는 어느새 36을 가리켰다. 잘해야 2컷 더 찍을 수 있으리라. 숄더백에 든 여분의 필름에 안심이다.

한창 공사중인 테라스하우스를 올려보며 한 롤을 마저 찍은 후 영일대 호텔 쪽으로 넘어간다. 필름을 교체하기 위해 잠시 멈춰 하판을 열었는데 바디 내부가 눈에 익은 모습이 아니었다.

.

아뿔싸!

순간 등줄기가 찌릿함을 느끼며 신속하게 하판을 다시 닫았다. 다 찍은 필름을 리와인드도 하지 않은 채 오픈해 버린거다. 대체 얼마나 그리고 어디까지 노광된걸까? 한 겨울 눈길 위에서 식은 땀이 흐른다.

.

.

어쩌겠냐. 이 멍청아.

잠시 간의 자책과 함께 필름을 되감은 후 새 필름을 로딩했다. 한 롤 촬영이 마치면 잡생각말고 되감기부터 해 놓는 습관을 들이기로 다짐하하고는 새 마음으로 촬영을 재개했다. 심란한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길 위에 어지러이 난 타이어자국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고요한 아침이다. 점점이 뒤뚱뒤뚱 걷는 이가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한다. 검은 계열의 두터운 겨울 옷을 입은 사람들은 설경 위에서 훌륭한 포인트가 되어 준다.

.

.

hyoja-5

.

.

.

hyoja-6

.

.

.

hyoja-7

.

.

.

영일대 호수의 설경을 두 눈으로 듬뿍 안는다. 얼어붙은 호수 주변으로 옹기종기 모여있는 각양의 나무들은 한번도 보여준 적 없는 풍경을 선물해주었다. 아름다운 풍경이다. 눈 앞 풍광을 턱없이 부족한 뷰파이더로 잘라내고는 걸음을 옮겼다.

.

.

.

hyoja-8

.

.

.hyoja-9

.

.

.hyoja-10

.

.

.hyoja-11

.

.

.

어느덧 시간은 8시를 넘어 겨울해가 꽤나 올라섰다.

작은 소녀가 자기 키 만한 빗자루를 들고 눈 쓰는 모습이 귀엽다. 함께 있는 아이 아빠의 허락을 구해 사진을 찍었다. (후에 메모해두었던 메일로 보내드렸다)

.

hyoja-13

.

.

.hyoja-14

.

.

.hyoja-15

.

.

효자동에 펼쳐진 마법은 골목소녀를 끝으로 해제되었고 얼마 후 걱정반 포기반의 마음으로 문제적 필름을 현상해보았다. 다행히 결과물은 네거티브의 부처핸섬 관용도 덕에 새까맣게 타지 않은 채 녹지 않는 눈의 마법처럼 남아있었다.

.

.

hyoja-2

.

.

.hyoja-3

.

.

.hyoja-4

.

.

.

카테고리:Drifting, Essay, uncategorized태그:, , , , , ,

1개의 댓글

  1. 비슷하네요. 저도 추위 참 많이타요. ㅎㅎ
    부산도 눈 구경하기 힘든 곳이라 눈사진은 꿈도 못꿔요.

    Liked by 1명

  2. 예전 학창시절에는 서리 내릴때 까쥐~ 반바지에 샌달 신고 학교 댕기고~ 도서관에서 잠도 쿨쿨 잘 자고 살았는데 말입니다.
    어느때 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삼실 책상 아래 난로가 없으면~ 신음소리가 나오기 시작하더군요.
    네~ 다리 사골까지 파고드는 추위 때문에~ 겨울이 싫습니다.T.T

    근데, 눈치우는 소녀를 보니~ 효자동은 역시 효자가 사는 동네인가봐요.

    Liked by 1명

    • 겨울에도 샌들에 반바지 차림으로 다니는 사람들 가끔 보는데 궁금했거든요. 정말 안추워서 그런건가 하고..
      그래도 세월엔 장사 없는가 봅니다. 겨울엔 군불에 엉댕이 뜨신 구들장이 최고쥬. ^^

      좋아요

  3. 지난 겨울 사진인데 돌아온 겨울에 맞춰 다시 엮어서 보니 더욱 좋네요. 설경은 찍고 싶지만 눈을 싫고 그렇습니다. ㅎㅎ

    Liked by 1명

  4. 카메라 하판을 여는 순간 저도 같이 오싹해졌습니다.^^
    눈오는 날 아침풍경 특히 마법의 빗자루를 들고 있는 아이 사진 참 좋아요.
    마음 따뜻한 겨울 보내세요.:)

    Liked by 1명

    • 하판 열었는데 보이지 말아야할 필름이 보이길래 얼마나 놀랬던지요. 메두사의 눈이라도 본 듯 얼른 뚜껑을 닫았더랬습니다. ㅋ
      얼마 남지 않은 2017년 잘 마무리하시고 행복한 2018년 맞이하셨음 좋겠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

      좋아요

  5. 사진도 이야기도 구성도 멋집니다.
    부럽기도 합니다.^^

    Liked by 1명

  6. 장비바꿈질하느라 소홀했던 매거진 탐독 중입니다.
    주아비님 사진과 글을 보면서 제가 많이 부끄럽네요.

    삿포로 가족여행 잘 하시구요.^^

    하판 열린 마지막 사진 멋집니다, ㅎ

    Liked by 1명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w

%s에 연결하는 중

%d 블로거가 이것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