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루


낯선 여행지에서 맞는 첫 아침,

새로운 풍경에 대한 호기심은 전날 이동 간의 여독 따위야 가볍게 털어주었다. 숙소 정문을 나서자 차갑다기보단 리프레싱한 오타루의 바람이 뺨을 스치고, 한적한 새벽 택시 위에 떨어진 삿포로의 별은 고독한 빛으로 이정표가 되어주니 짙은 어둠에도 감도 400짜리 필름에 자신감이 붙는다. 개략적인 동선은 구글맵을 통해 이미 염두하고 있으나, 골목 단위의 구체적인 움직임까지는 정하지 않았다. 그저 빛이 들고나는 방향과 골목이 풍기는 냄새 그리고 사람들 발자국 소리 따라 같이 흘러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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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근한 이름 덕분일까? 서너블럭 골목을 걸었음에도 오타루는 나를 그리고 나는 오타루를 금세 끌어안는다. 영화 ‘러브레터’에서 보았던 오타루의 비탈길로 샌프란시스코의 가파름 따위를 연상하고 있었지만, 오타루역에서 항구로 이어지는 길은 보다 온건한 기울기였기에 여행자의 기분 좋은 아침 산보에 안성맞춤이었다.

하지만, 허리춤까지 눈에 잠긴 전봇대와 가로수 그리고 의도치 않은 빙벽들을 지나치며 나는 생각을 고쳐먹을 수 밖에 없었다. 동해의 습기를 잔뜩 품은 북극의 찬 바람은 육지와 부딪혀 엄청난 양의 눈을 뿌려대는 탓에 이 곳 북해도의 서부지역은 연평균 4~6m까지 눈이 내린다. (믿기지 않았지만) 올해는 눈이 적게 내린 편이라고는 하나, 어스름한 새벽녘임에도 제설작업으로 분주한 불도저와 포크레인들이 아니었다면 이방인의 기분 좋은 산보는 있을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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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두송이 흩날리나 싶던 눈이 제법 떨어지기 시작한다. 운하 곁에 위치한 단정한 창고건물들은 내리는 눈과 더불어 동화 속에나 나올법 한 스노우볼 마을을 연출하고, 골목 모퉁이에서 새하얀 눈토끼가 불쑥 튀어나와 따뜻한 우유한잔 건넨다 한들 이상하지 않을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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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70년 전 개척기 이래 북해도의 각종 수산자원과 농산물을 본섬으로 우직하게 운반했을 항구를 한바퀴 돌아 숙소방향으로 루트로 정했다. 오타루의 속살이 궁금했기에 이왕이면 좁은 골목이 빽빽해 보이는 주택가로 접어들었다. 부산 보수동의 여느 비탈길을 걷는듯한 기시감이 잠시 들었지만, 골목 여기저기 두텁게 적립된 눈과 얼음은 나로 하여금 낯선 동네에 있음을 재차 상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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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시를 조금 넘긴 시각, 거리에는 집 앞의 눈을 치우는 주민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한다. 하긴 이렇게 눈을 뿌려대는 세상에서 조금 느슨했다가는 집으로 들어가는 길이 막히고 문조차 열 수 없을테니 이들에게는 불가항력적 의무일게다. 이렇게 그들과 나는 같은 시간과 공간에 섰지만 발 아래 쌓인 눈에 대한 감상은 세상 다른 일일 것이란 생각이 문득 든다. 목에 걸린 카메라와 손에 들린 넉가래의 컨트라스트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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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taken with ilford hp5+)

 

카테고리:Drifting, Essay, uncategorized태그:, , , , , ,

1개의 댓글

  1. 빛이 들고나고, 풍기는 냄새를 맡고, 발자국 소리를 따라 가다니요. 그저 작품이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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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낯설지만 포근한 풍경~ 녹아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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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얼마 차이나지 않는 시차에 한 번쯤 지났을 만한 풍경들인데, 또 새롭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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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오타루에 두고 온 마음이 떠날 생각이 없나 봅니다.
    사진 참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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