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남과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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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서 시작했다는 인류는 새로운 땅을 찾아 떠났다. 땅의 주인이 되지 못한 그들은 새로운 땅을 찾아 부유浮遊했고 그렇게 수만 년을 흘러 다녔다. 매순간 만나는 위험과 공포에서 그들을 지킬 수 있는 것은 날선 긴장 말고는 없다. 여행을 생각하면서부터 시작되는 긴장과 흥분은 꼬리뼈 흔적마냥 부유하던 그들의 유전자가 남은거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떠남은 본능적 작용이고 새로운 세계(세상)와의 만남은 필연적 결과일 수밖에 없다.

기필코 떠나야하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지 알고 싶었지만 내 주변머리로 닿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삶이 정주가 아니라 여행이길 바랬다. 흐르고 흘러 바다에 닿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행이 삶을 닮은 것인지 삶이 여행을 닮은 것인지 아니면 삶이 여행 그 자체인 것인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삶이 여행이라면 나는 왜 또 다른 여행을 꿈꾸는 것인가!

여행은 익숙한 것에서 나를 떼어내 낯선 곳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이것은 내게 숭고한 의식이며 순례다. 나를 내게서 떼어내 낯선 곳에 팽개칠 때 비로소 선명해지는 것이 있다. 숲에서 멀어져야 숲이 보인다. 여행은 익숙한 것에서 나를 떼어내 나를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기실 순례는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안목 있는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순례자를 만날 수 있다. 회사에서 거리에서 마트에서 만원 지하철에서 만나는 순례자들은 일상의 무거운 짐을 묵묵히 짊어지고 간다. 그것은 마치 오체투지의 간절함이나 절정과도 같아서 뚜벅뚜벅 진리에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모든 사람이 운남으로 가야할 이유 따위는 없다.

여행은 낯선 곳에서 만나는 익숙함과 익숙한 곳에서 그리던 낯섬이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 것이다. 떠나온 그곳이 두발 꼭 붙이고 있어야 할 곳임을 비로소 발견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돌아 와야 할 이유를 얻는다. 일상의 찬란함이 발견되는 순간이다. 시끌벅적한 시골장터에서 만원 버스와 지옥철에서 섞이지 못하고 박리된 나는 꼼짝없는 이방인이다. 때문에 그들의 일상을 객관적 기록으로 관조할 수 있다. 동동거리는 세상을 낯선 곳에서 발견하고 도망치듯 떠나온 곳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상처는 치유된다.

여행은 육십억 가운데 하나이던 내가 ‘육십억 가운데 유일한 나’를 만나는 것이다. 따분하고 존재감 없던 내가 나로 빛난다. 일상이 미늘달린 바늘을 삼킨 것 마냥 토해낼 수 없는 것이라면 여행은 온전히 내 것인 냥 순하고 편안하다. 이 시간 안에서 비로소 나는 일상과 유리되어 일상을 관조할 수 있게 된다. 세계는 나를 중심으로 아웃포커싱 되고 나는 세상의 주연이 된다. 생각하고 말하고 쓰고 움직이는 것이 달라졌다. 어제보다 찬란한 오늘이다. 이 순간도 결국 삶 한 덩어리 뭉툭 베어 쓰는 것이므로 삶의 살덩어리다. 일상에 함몰되어 쪼그라든 나는 사라지고 빛나는 별 하나를 만나게 된다.

여행은 ‘만남’과도 맞닿아 있다. 떠나서 만나게 되는 것인지 만나기 위해서 떠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떠남은 만남을 전제하고 만남은 떠남을 전제한다. 서로가 서로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성립할 수 없으니 결국 떠남과 만남은 동의어인 셈이다.

나를 떠나서 나를 만나고 나를 찾아 고향으로 돌아오자.

어쩌자고 또 가슴이 벌렁거리는가. 길 떠났던 먼 조상들의 부름이 잠들었던 유전자를 깨워놓고야 마는 것인가. 생활에 목매고 있지만 짐짓 그렇지 않은 듯 살 수 있길 바란다. 나란 놈은 굴림 하는 것도 굴림 당하는 것도 감당할 수 없다. 생활과 관습의 봉인을 해체하고 나란 인간에게로 좀 더 다가가고 싶을 뿐이다. 내면적 울음에 기꺼이 보내는 위로, 그리고 아직 가 보지 못한 길로 들어서고 싶다. 내면의 깊고 광활함을 확인하고 싶다. 열린 가슴으로 교만을 내려놓고 더 낮은 곳으로 나를 데려가라. ‘해냈느냐?’라는 세상의 질문에 답해야 한다. ‘할 수 있다’는 더 이상 무의미하다. ‘해냄’으로 ‘할 수 있음’을 증명해야한다. 이것은 마치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 하는 것과 같은 문제여서 내겐 여간 곤혹스런 것이 아니다. 움켜질수록 빠져나가는 모래 같은 것. 정제되지 못한 욕망에 대한 반성, 세상의 욕망은 성숙한 심연에서 요구한 것이 아니다.

나는 나를 잘 쓰고 싶다. 여행은 그것을 배우는 것이다.

 

관도고진, Kunming, Yunnan, China / 2017. 12

 

일요시장, Kunming, Yunnan, China / 2017. 12
with GR

 

 

 

카테고리:Drifting, Essay태그:, , , , , , , , , ,

1개의 댓글

  1. 존재하기 위한 전제를 서로공유하는 ‘떠남과 만남’.. 그래서 둘은 같은 의미라는 말씀이 와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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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저도 그렇지만, 역마살이 어지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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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언제나 부러워요.. 형님 캐리어에 담겨서 좀 가봐야 할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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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글을 읽고 있으니 말입니다. 저도 또한 담대한 인류애적 담론 속으로 그냥 처벅~ 처벅~ 걸어들어가는 느낌~!

    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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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글쓰기 참 어려운데 글읽고 있으면 막 좋고 … 그러다가 부럽기도 하고 그럽니다 ^^;;;

    사람 살아가는 향기 나는 사진 … 참 좋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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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이라기 보다 아직은 배설에 가깝지 않나 싶습니다.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

      향기나는 사진을 찍고 싶습니다. 대상이 사진가와 호흡하는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압도하는 프레임은 제 능력이 아닌지라 포기한지 오렌지고 무심한 듯 툭툭 찍어보고 싶은데 쉽지가 않아서 괴롭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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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저두 좀 댈구가세요 ㄷ 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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