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 시뮬라크르


눈이 내린다. 내리는 눈은 세상을 공평하게 덮는다.

강설이 누적 됨에 따라 땅 위의 존재들은 차츰 모습을 감추고 (그 중 운 좋은 녀석들은) 그의 부재를 알리는 표식들 만이 덩그러니 세상에 남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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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홋카이도에서는 독특한 도로 표식을 만날 수 있는데, 눈 덮인 도로의 경계를 운전자가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도로 끝선을 나타내는 역화살 표지판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설치 되어 있다. 여기서 재밌는 것은 도로표지판이 아무리 그곳이 도로의 끝이라 우겨도 눈 녹은 도로 모습을 본 적 없는 나는 눈 밑 도로의 존재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 커브길을 주의하라는 안내판 역시 이와 마찬가지. 별다른 도리 없이 그리 맹신할 수 밖에 없다. 바로 이 순간 표식은 나에게 실재를 반영한 시뮬라크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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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홋카이도의 동토에서 만나는 표상 되어진 것들의 세계는 원형들의 세계를 훌쩍 뛰어넘는 아름다움을 발산했다. 지극한 아름다움은 진리와 맞닿아있기에 필연적으로 원형의 우위가 부인되는 지점이 발생했고, 질 들뢰즈의 말처럼 나는 홋카이도의 설경에 매료되어 시뮬라크르 찬양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낯선 여행자 앞에 던져진 기호들이 사라진 존재를 압도하고 맹목의 진리로 작동하는 겨울 홋카이도는 표상 되어진 가상이 실재를 대체하는 그야말로 진실된 하이퍼 리얼리티의 세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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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쌔끈했던 하이퍼 리얼리티로부터 구차한 현실로 돌아올 수 밖에 없는 나는 흑과 백의 톤으로 걸러져 채 또 한번 기원을 상실해 버린 그러나 동시에 독자적인 생명을 획득한 몇 장의 시뮬라크르를 통해 설국의 추억을 더듬을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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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taken with summicron 35mm, ilford hp5+

카테고리:Drifting, Essay, uncategorized태그:, , , , , , , , ,

1개의 댓글

  1. 저도 기호를 좋아하지만 처음 도착한 홋카이도에서는 좀 반대의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마도 제가 있었던 곳은 저만큼 눈이 쌓이지 않은 곳이서서 애매한 느낌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실체는 무엇인지 기호로만 추정할 수 있으니 환상적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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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일단 사진이 참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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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플라톤에 의한 들뢰즈의 시뮬라크르, 오랜만에 들어봅니다.
    10년도 더 전에 처음 접했을때 책속의 말들이 도대체 뭔말인지 한참을 헤멨던 기억이 납니다. ^^
    워낙 개인적인 인간이라 저는 바라보는 모든 것들이 무조건 푼크툼이였습니다.
    저런 제대로 설국에 카메라들고 한번도 못가봐서 그저 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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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시간 반 거리에 시베리아에서나 볼 법한 설경을 볼 수 있다는 것이 그저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바닥이 온통 반사판이라 그런지 아내랑 아이사진도 더 예쁘게 나옵니다. 이걸로 사모님 한번 꼬드겨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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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그 높이 달린 화살표까지 눈이 쌓인답니다.
    그래서 그 높이에 있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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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심오한 언어들에 몸을 실어서 날리시는 작품적 펀치~ 덕분에 또 하나 배웠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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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비현실적 현실이랄까요.
    아름다운 사진입니다.

    범속한 우리는 我相에서 벗어날 수 없는 천형을 지고 살아야 겠지만 그러나 그것을 그 안에서 인식할 수 있는 영역을 조금씩 확장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 저는 이것을 자기경영이란 말로 뭉뚱거립니다만 … 희망고문을 오늘도 쉬지 않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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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저는 사진 행위가, 획득하고 싶은 찰나를 정지시키고 복제하는 것 같지만, 그건 그 순간만 그렇지, 시간이 지나면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고 믿고 싶었어요. 주아비님이 비슷한 생각을 하신 것 같아 반갑고 재밌습니다. 눈밭 깊숙히 다리를 내리고 춥고 딱딱한 땅속에서 생명을 빨아올리는 듯한 이미지에 감명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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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짜가 나타나셨네요. 글 제목 이렇게 정해놓으면 오실줄 알았어요 ^^ 풍경에 대한 단편적인 감상을 1도 이해못한 심오한 사상에 우격다짐으로 끼워맞춘격이라 그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그냥 사진만 봐주시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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