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곳에 내가 있었네


사실 다음날 일찍 출발해도 ‘그곳’에 가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가로등 드문한 초행의 제주길을 새벽부터 운전해야 한다는 일이 부담이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 늦잠 걱정에 차라리 먼저 가서 불편하더라도 차 안에서 잠을 청하기로 맘을 먹었다. 그렇게 나는 2014년 어느 초여름 밤 제주달빛의 안내를 따라 ‘그곳’에 도착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좁은 뒷좌석에서 잔뜩 웅크린 채 새우잠을 청하는데 안전벨트에 자꾸만 등이 배기는 바람에 여러 차례 잠을 설쳤다. 불행 중 다행으로 묵직한 피곤함 덕분에 겨우 선잠까지 들 수 있었지만 오래지 않아 매정한 알람은 약속된 시간 새벽 4시에 나를 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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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이 밝아오려면 1시간 정도 남았으리라. 주섬주섬 삼각대와 백팩을 챙겨 ‘그곳’과 이웃한 다랑쉬오름을 프레임에 걸었다. 차에서 내릴때만해도 쌀쌀한가 싶어 입었던 바람막이는 이미 벗어둔 채다. 기분 좋은 바람을 방해받고 싶지 않은 바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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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섬 제주에는 큰 형님 한라산과 더불어 소화산체인 360여개의 아우뻘 오름들이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많은 오름들 중에서도 으뜸은 제주시 구좌읍에 위치한 ‘이곳’ 용눈이오름이랄 수 있는데, 부드러운 능선을 오르면 성산 앞바다까지 감상할 수 있는데다 주변으론 다랑쉬오름과 거문오름, 백약이오름 등이 위치하고 있어 오름과 오름, 곡선과 곡선이 만나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콜라보는 우리로 하여금 목에 걸린 카메라든 주머니 속 핸드폰이든 꺼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이러한 거역할 수 없는 아름다움 덕분에 살아생전 제주의 영혼을 필름에 담아낸 김영갑 작가 역시 용눈이를 가장 아끼고 사랑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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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어스름한 달빛 아래 적적할 법한 새벽 산행이건만 스쳐가는 간지러운 제주바람은 마음을 포근하게 한다. 매력적인 바람의 정체가 궁금해 주위를 둘러보아도 하늘과 오름경계에 위치한 수풀의 일렁임만이 그 존재를 짐작케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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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미터도 채 안되는 ‘이곳’ 정상까지는 사진찍는 더딘 걸음에 1시간이나 걸려 버렸다. 정상에 서서 탁 트인 시야에 한 숨 크게 들이킨다. 우도와 성산포를 아우르는 환상적인 파노라마가 펼쳐지는 곳, 묵직한 존재감의 일출봉이 신령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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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의 바람은 한층 강렬했다. 풍광을 감상하느라 곁에 잠시 세워둔 삼각대가 휙하며 넘어질 정도였다. 쓰러진 삼각대를 핑계로 무거운 배낭과 카메라를 바닥에 내렸다. 그러고는 천년 제주의 바람이 어루만진 거대한 곡선 위에 퍼질러 앉았다. 몸이 가벼워지니 자연스레 마음도 여유로워진다. 육지에서 주렁주렁 달고왔던 스트레스와 잡스런 생각들마저 덩달아 바람에 실어보내며 ‘좋다’, ‘좋다’, ‘좋다’를 몇번이고 되뇌였다. 마치 이 순간이 생애 마지막 순간인 것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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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간 광활한 초원에는 눈을 흐리게 하는 색깔이 없다.

귀를 멀게하는 난잡한 소리도 없다.

코를 막히게 하는 역겨운 냄새도 없다.

입맛을 상하게 하는 잡다한 맛도 없다.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그 어떤 것도 없다.

나는 그런 중산간 초원과 오름을 사랑한다.

 

“그 섬에 내가 있었네”, 김영갑(1957-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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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Drifting, Essay, uncategorized태그:, , , , ,

1개의 댓글

  1. 제주를 수도 없이 드나들면서 정작 오름에는 한번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이래서야 제주를 많이 가봤다고 주장할 수 없겠군요. 좋은 사진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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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주아비 팬입니다.
    좋은 재주에요.
    멋진 사진 고맙습니다.
    덕분에 기분이 참 좋습니다.
    색을 잘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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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소나 양은 아니지만~ 풀잎이 싱그럽게 보이는게~ ㄷㄷ 아~ 아닙니다.

    그리고 바람마져 싱그럽게 느껴짐은 주아비님의 촬영 쏨씨인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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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의 바람을 한톨이나마 같이 공유하고 싶었는데 사진을 통해 제 마음이, 제 느낌이 전달된 것 같아 무척 기분이 좋습니다.
      늘 고맙습니다. 보떼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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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사진 보고 마음이 쿵~
    그 곳이 저의 고향이란게 참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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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세번째 사진에서 잠시 숨을 들이켰습니다. 저도 참으로 좋아라하는 제주지만 주아비님의 제주는 그 맛이 정말 남다르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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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제주 사람인 제가 봐도 참 좋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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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요즘 가족들이 제주도 가고 싶다고 한참을 졸라도 못가고 있네요.. 이렇게 주아비님 글 보니 다짐을 하게 됩니다. 자극과 충동을 일으키는 사진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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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도는 섬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스튜디오 같습니다. 사람이면 사람 인물이면 인물.. 다 이쁘게 나오는 것 같아요. 이 좋은 날씨 더 지나가버리기 전에 주말 끼고 한번 다녀오셔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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