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멘토 모리


포항에서 경주 양북으로 넘어가는 고개맡에는 예로부터 묵밭이 많아 이를 한자로 표기하여 진전리(陳田里)라 불리는 동네가 있다. 이곳에는 오래된 폐교가 하나 있는데 친구의 소개로 얼마 전 방문하였다. 폐교의 이름은 진전국민학교로 1951년 마을 입구에 있는 문충초등학교의 진전리 분교로 설립되었다가 1970년 국민학교로 독립하였으나 학생수 감소로 1986년 결국 문을 닫았다.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변하기 전이었으므로 영원히 국민학교로 남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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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는 천진한 아이들이 뛰놀던 운동장이었을 왕복 4차로에서 바라보면, 학교는 총 3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친구의 설명에 의하면 오른쪽은 외진 곳에 근무하는 선생님을 위한 관사, 중간과 왼쪽 건물은 교실이라는데, 맨 왼쪽의 건물은 근처 농가의 개짖는 소리 때문에 접근조차 힘들다고 귀뜸한다. 우리는 오른쪽의 관사건물 쪽으로 들어가보기로 했다. 30년 이상 폐교로 방치된 이 곳은 켜켜이 쌓인 시간의 두께만큼이나 오싹한 느낌 때문에 한발 한발 내딪기가 쉽지 않았다. 동행했던 두 명이 아니었다면 셔터 누를 생각조차 못하고 그냥 돌아와버렸을 정도로 산기슭의 아담한 건물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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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벽에 반듯하게 씌여진 글귀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저 문구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걸까. 서슬퍼런 ‘무한경쟁’의 30년 세월은 초등학교에서마저 ‘부지런히 공부하자’의 가치만 남긴 채 ‘착하게 서로돕고’의 미덕은 지워버렸다.같은 교실에서 공부하고 같은 운동장에서 노는 친구지만 잘 가르친다는 학원만큼은 친구 몰래 끊어다니는 차가운 세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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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사 쪽을 휙하고 둘러본 후 교실이 위치한 본동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미 건물의 음험한 아우라에 압도되어버린 우리는 조심스런 발소리와 셔터소리 외에는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미 돈 될 만한 것들은 모두 뜯어가버렸는지 교실 내부는 온통 회색빛 벽돌과 콘크리트만 남은 채 인테리어랄 것도 없다. 비록 늦은 오후의 따뜻한 빛 덕분에 순화된 분위기였지만, 만약 어스름한 달빛 아래 내가 서있었다면 천정에 을씨년스럽게 늘어진 합판갈래들은 목매단 처녀귀신의 머리칼로 보일 것이다. 으…상상만으로도 등더리가 서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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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체 여기저기 분필 낙서들이 눈에 들어왔다. “OOO 사랑한다” 혹은 “병 5**기 다녀감” 같은 낙서와 더불어 다소 유치하다 싶은 “19금 그라피티”들로 보아 폐교 이후에는 군인들의 숙영지로 사용된 듯하다. 특히 씌여진 해병 기수번호가 500번대이니 진전국민학교가 폐교된 1986년 바로 직후로 보인다. 혹시 이 곳이 담력증강을 위해 사용된 장소인가 싶어 주변 해병대 전역자 몇에게 물어보기도 했지만 그런 훈련을 받은 적 없었다는 얘기를 종합해보면, 폐교 직후 해병대 숙영지로 잠시 사용되다가 몇 년 이후엔 그 마저의 용도도 폐기된 채 완전히 버려진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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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떨어진 창문 틀은 절묘한 액자가 되었다. 낙엽과 짝을 잃어버린 신발 그리고 비디오테이프 하나. ‘러시아하우스’를 스마트폰으로 검색해보니 ‘숀 코네리’, ‘미셸 파이퍼’ 주연의1990년 영화다. 아마도 이곳은 90년대 초까지도 사람들의 왕래가 있었던 것이리라. 시간이 박제된 네모난 틀은 2018년의 나로 하여금 졸업과 대학입학, 군입대를 겪었던 20세기 말의 나를 잠시 환기시켰다. 20년 전의 내게 인생은 달콤했고 미래는 그저 쉽게 주어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시간은 오직 한 방향으로만 흘렀다. 결코 돌아갈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야속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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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거대한 콘크리트의 시체 속에서 나는 문득 죽음을 떠올렸다. 폐교에 들어오면서부터 줄곧 나를 짓누르던 막연한 두려움의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사라지고 잊혀지는 것은 바로 죽음과 가장 직접적인 인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라지지 않기 위해 그리고 잊혀지지 않기 위해 1분1초를 치열하게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치열하고 성의있는 삶은 죽음으로부터 되도록 멀리 도망치고자 하는 행위가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죽음을 항상 상기하며 사는 삶이다.죽음을 생각하며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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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도 금쪽같은 시간은 흘러간다. 내 인생에서 가장 젊은 순간..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 말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생의 유한함을 기억함과 동시에 현재에 충실하기 위하여 롤라이플렉스를 삼각대에 올리고서 사진 한 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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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taken with summicron 35mm 4th and ilford h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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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Drifting, Essay, uncategorized태그:, , , , ,

1개의 댓글

  1. 실내가 위험하진 않으셨을지 걱정이 되었네요. 귀중한 곳이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을 수 있지만, 그래도 소중한 사진들 잘 보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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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전에 유의하면서 조심조심 다녔습니다만, 걱정의 말씀 감사드립니다. ^^
      스러져가는 것들은 필연적으로 사진찍는 사람들을 필요로하고 그 반대도 성립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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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그곳의 일상은 폐교되는 그 시점에 멈춰있네요.

    근데 금세 흘러버리는 시간이라고 말씀하시니~ 막 갑자기 멍먹한 이 느낌이 말입니다.
    저도 기록적 의미를 잘 챙겨 둬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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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루하루는 무척 더딘것 같은데 일주일, 한달, 일년은 또 얼마나 빨리 흘러가는지 문득문득 놀라곤 합니다.
      셔터 누르는 것처럼 가끔은 너무 빨리 흘러가는 시간 정지시키고 싶을때가 있더라구요.
      보떼님께서도 총알같이 흘러가는 시간 알차게 보내시길 기원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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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고단한 시간입니다.
    흔적들을 찾는 에너지가 제거되고 없는 줄 알았더니 주아비의 기록을 보는 순간 다시 눈뜨고 막 그러네요.

    여러가지 기억들이 소환됩니다.

    사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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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러져가는 것들에 대한 기록은 셔터를 누르는 이들에게 주어진 의무이자 특권이라 믿습니다.
      제 사진들로 말미암아 가슴속에 묻혀있던 무언가를 재발견하셨다니 기분이 좋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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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창문틀 사진 한참을 바라봤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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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문틀 사진 안에서 행바님의 추억을 자극하는 ‘어떤 것’이 있으셨는지요?
      그냥저냥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울만큼 살기좋은 날씨의 요즘입니다. 늘 행복하시기 기원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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