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 그 후


오후 2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여느때와 같이 모니터에 띄워진 워드프로세서 화면에 집중하고 있는데, 사파리 물소떼라도 몰려오는 듯이 세상 낯선소음과 함께 사무실 바닥이 갑자기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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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덜덜덜….크르렁…드르르르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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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군더더기 없이 신속한 동작으로 책상 아래 몸을 구겨넣었다. 1년 전 규모 5.8의 역대급 경주 지진에 따른 실전경험 덕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머리를 조아린 채 두려운 지진파를 온몸으로 견뎌내는 것 뿐이었다. 사무실 내 모든 집기비품들이 점호라도 하듯 일제히 큰 소리를 내며 덜그덕거리고, 거대한 손이 건물외벽을 뒤흔드는 듯 바닥은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다. 같은 사무실 직원들은 흔들림이 멈추자 즉시 건물 밖으로 튀어나갔다. 계단은 어찌 내려갔는지 문은 어떻게 열었는지 기억조차 없을 정도로 정신없이 도망쳐나왔다. 안전한 야외에서 잠시 숨을 돌린 후 가족 걱정에 휴대폰을 꺼내려는데 주머니가 허전하다. 급한 마음에 핸드폰이고 뭐고 몸만 빠져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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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일평생 겪음직한 사고와 재난이 어디 하나, 둘이겠냐만은 대부분 예측이 가능하기에 미리 조심하고 주의한다면 사전에 예방이 가능하다고 본다. 하지만 예고도 없이 엄습하는 무지막지한 지진은 정말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진정한 두려움을 이야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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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 공포로 잠도 제대로 못 잘 지경에 미디어에서는 한술 더 떠 “한반도는 더 이상 지진안전지대가 아니다”고 떠들기 시작했다. 만약 일본처럼 규모 7이상의 대지진이라도 발생한다면 어떻게 되나. 1995년 한신대지진의 영상을 찾아봤다. 육중한 건물과 고가도로는 맥없이 무너지고 화재로 인한 검은 연기가 도시 곳곳에서 솟아오르는 아비규환이다. 고베 시가지에 자꾸만 포항 풍경이 오버랩되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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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또 다시 지진 온다 한들 목구멍 풀칠용 직장에 단단히 매인 신세라 포항 땅을 벗어날 수가 없다. 내 손에 쥐어진 유일한 옵션은 그저 행운의 여신 ‘포르투나’의 미소가 늘 함께 해주길 바라는 것뿐이다.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다는 존재의 무력감은 참으로 잔인한 것이다. 지진은 그렇게나 끔찍하고 무서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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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 피해는 주로 진앙지에 인접한 포항 흥해지역에 집중되었다.

지진 피해가 가장 심한 곳으로 알려진 흥해 대성아파트는 지진 후 전체 6개 동 가운데 절반인 3개 동이 붕괴 우려가 높아 시에서는 사용금지 처분을 내렸고 3∼4도 가량 기울어진 건물 1동은 철거가 이미 결정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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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 관련 뉴스를 매일 접하니 실제 피해상황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지만 선뜻 현장을 찾을 용기가 없었다. 치기어린 행동으로 마른하늘 날벼락 같은 지진에 큰 상처를 입은 이들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게 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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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몇 주간의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시간은 그곳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해주지 못했다. 그리고 시간은 결코 누군가를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사진으로부터 배웠다.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안된다. 십년 뒤 후회하지 않을 자신 따위는 없었다. 결국 시간을 내어 흥해에 들렀다. 무거운 마음에 장비는 최소한으로 챙긴 터였다. 카메라는 크로스로 매고 여분의 필름 한 통은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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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금지처분으로 인기척 없는 대성아파트는 늦오후의 따뜻한 햇살로도 을씨년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3~4도 기울었다는 건물은 실제 10도 이상 휘청한듯 보였다. 기울어진 쪽 기단부 콘크리트는 과도한 압축력을 이기지 못하여 부서지고 으스러졌으며, 팔뚝만한 크랙이 여기저기로 음흉하게 손을 뻗쳤다. 한때 주민들의 생활편의를 돕던 관리실은 재난안전대책본부로 변한듯 보였고 아파트 한켠의 단촐한 놀이터에는 깊은 슬픔으로 영원히 볕이 들지 않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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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파트를 벗어나 옆으로 난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주변 빌라와 주택들 역시 아물지 못한 상처를 드러낸 채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린다. 노랑색 어린이집 승합차는 난데없는 낙하물에 속 빈 맥주캔마냥 힘 없이 찌그러져 버렸다. 평소 즐겨 마지않던 채집행위였지만 오늘만은 금세 지쳐 힘에 부치기 시작한다. 의지와 관계없이 이루어지는 끊임없는 감정이입의 결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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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항력의 거대한 재해 앞에서 일개 인간이 느끼는 참을 수 없는 무기력함은 삶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하게끔 만든다. 트라우마 이전의 삶을 지탱하던 규칙이나 목표, 신념 따위는 더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고 재난 발생 후 시간이 흘러 피해자 중심으로 움직이던 세상과 사람들이 차차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트라우마는 오롯이 남겨진 자들만의 몫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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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고 싶은 아픈 기억일수록 그 기억은 잔인하도록 디테일하기에 나는 이들의 아픔이 이들만의 아픔이 되지 않기를 원한다. 여기 사진들은 다만 잊지않기 위한 나만의 다짐이자 몸부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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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ll taken with summicron 35mm and ilford h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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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Drifting, Essay, uncategorized태그:, , , , ,

1개의 댓글

  1. 애써 지우고도 싶고, 아름답고 멋진 사진만 남기고싶은데…
    참 사진가답게 정면으로 기억을 담아냈구나…
    불과 몇개월전 일인데 아련한 옛일처럼
    불안한 기억은 지우고 당연한듯 살아가는거 같네.
    땅이 약간만 흔들려도 우리 삶은 많이 흔들리는 연약한 갈대같애.

    진짜 기록할 가치, 사진으로 남길 가치는 바로 여기에 이렇게 담겨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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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날 한번 이후로는 나 역시 여러 이유로 가질 못했네. 망각은 제한적인 뇌용량에 대비한 효율적인 처리방식이라곤하지만 때론 애써 잊지 말아야할 아픔이나 교훈들도 있는것 같다. 어쨌든 다시 큰 지진이 오지 않고 있어 불행 중 큰 다행이라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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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생생한 기록입니다.
    어쩌다 보니 포항에 지인들이 제법 많습니다.
    비교적 자주 만나고 있습니다만 공포나 트라우마를 느끼지는 못했습니다.
    걱정과 걱정과 걱정을 나누긴 했습니다만 또 터전이니 어쩌지도 못하고 말이죠.

    우리는 모두 떠나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또 슬픈지도 모르겠습니다.

    Liked by 1명

    • 일견 자유로운 삶을 사는듯하지만 현실적인 제약들로 ‘떠나지 못하는 자’임을 지진때문에 새삼 실감했습니다.
      토착민 입장에선 부디 지열발전소가 원인이길 기원할 따름입니다.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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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잊지 않기 위한 다짐, 어렵게 담으신 사진들 잘 보았습니다.

    Liked by 1명

  4. 직접 겪지 않은 경험이지만 기록들을 보고 있자니 뒷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이 듭니다. 앞으로는 늘 평온한 동네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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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나간 자리의 모습만으로도 당시의 상황이 어떠했는지 충분히 짐작코도 남았습니다.
      같은 포항이라도 몇 키로 차이로 체감강도가 달랐다고 합니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그때 한번으로 끝났으면 하는 바람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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